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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11. 2023

서울의 봄

1979년 12월 12일, 1980년 5월 18일은 어떤 날일까. 

광주의 거리는 스산했으며 분위기는 암울했다. 이때 필자의 작은 이모는 광주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무슨 일인지도 몰랐지만 아무도 밖에 나가지 못했으며 이동은 금지가 되다시피 했다. 왜 그런지도 몰랐고 잘못 나갔다가 이유 없이 맞기도 하고 끌려가기도 했다. 후방에 투입해서 교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공수부대원들은 남쪽으로 내려가 광주에 안착하였다. 비상계엄령은 누군가가 왕의 권력을 쥐어줄 하나의 수단이었다. 광주의 그 시간들은 이미 본편의 프리퀄처럼 6개월 전에 예고가 되어 있었다. 시간상으로 본편보다 더 앞선, 즉 과거의 이야기를 다룬 속편이 그려진 1979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전두환의 12.12가 성공한 배경에는 군부의 무능과 탐욕이 한몫을 했다. 물론 박정희 이후에 국무총리였던 최규하의 무능도 한몫을 했지만 말이다. 한국의 군대의 뿌리는 짧다. 해방 이후에 급조된 육군사관학교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인해 정신적인 준비가 덜된 간부들을 대거배출한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전두환과 노태우와 같은 덜 돼먹은 엘리트주의를 가진 사람들이 육사에 입교하면서 문제의 씨앗이 만들어진다. 일명 하나회는 한국전쟁 이후에 안정되어 가는 한국사회에서 최초로 4년을 교육받고 배출되는 초급장교들의 모임이기도 하다. 철저하게 학연, 지연으로 뭉쳐진 이들은 지들이 4년을 제대로 교육받고 배출된 육사 1기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박정희에게 충성을 다하기 시작했다. 

한강의 기적이 한강의 지옥이 될 것이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해왔다. 정신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이 갑자기 크게 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된다. 개인적으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성장하더라도 빈부의 격차는 적게 일어나며 골고루 발전이 되었어야 하지만 박정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서울과 강남에 집중하고 대기업에 모든 혜택을 몰아주었다. 그런 와중에 국민성은 묘하게 뒤틀려갔다. 물론 정권을 잡은 명분이 부족한 박정희에게는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되겠다는 압박감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재빨리 일본과의 수교를 통해 돈을 끌어오고 고속도로를 놓았으며 노동자들을 갈아 넣어서 성장동력을 만들어냈다.

전두환은 그런 박정희를 보면서 꿈을 키워나갔다.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박정희에게 받은 돈을 후배와 동기들에게 뿌려가면서 하나회의 조직력을 장악해 나갔다. 육군소장에 불과했던 그가 위에 있었던 별들을 압박하면서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박정희 사후에 보안사령관으로 사태를 수습하면서 정부를 장악해 가던 그를 동해로 보내려고 했지만 전두환은 선수를 치기로 한다. 12월 12일은 이들에게 D-Day였다. 비 육사출신의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이 걸림돌이기는 했지만 그 수하에 지휘권은 하나회소속들이 쥐고 있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철저한 이인자로 삶을 살아간다. 육사 정규과정 4년을 받은 첫 번째라는 의미의 하나를 붙인 하나회라는 조직에서도 나름의 역할을 한다. 하나회 출신이 아니었던 사람도 있었다. 9 공수여단장은 하나회 출신이 아니었으며 실제 서울까지 진입을 한다. 육군참모차장이 신사협정을 이유로 돌아가는 지시를 내리며 9 공수여단은 발길을 돌렸다. 

12.12가 일어나고 1980년의 봄이 찾아왔다. 유신헌법 폐지와 민주적 선거를 요구하는 시민사회 목소리가 거세지자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민주 정부 출범을 약속한다. 신군부는 개헌 논의를 앞둔 5월 17일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킨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 해산과 동시에 초법적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설치해 모든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광주에서 5월 18일 봉쇄한 후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되고 난 다음에 9월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다. 

1979년 12.12 이후 대전에서 EXPO를 준비하며 한참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인 1997년 7월 정우성이 역을 맡았던 장 전 사령관은 동료 장성들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 반란을 주도한 34명을 검찰에 고소했지만 검찰은 1년 뒤, 전원에 대해 "죄가 인정되지만 처벌하지 않는다"는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검찰은 의도적으로 죄를 묻지 않았으며 재판에 올라가지도 않았지만 전두환과 노태우가 받은 엄청난 비자금이 폭로되면서 여론이 악화 되자 정치권은 결국 특별법을 만들었고 떠밀리듯 재수사에 들어간 검찰은 이듬해 이들 중 16명만 재판에 넘겼다. 1심에서 전두환 사형, 노태우 22년 6개월을 선고했고, 전두환 비서실장이던 허화평 등 징역 10년이 4명, 징역 8년 4명, 징역 7년 3명, 징역 4년은 2명이었다. 그렇지만 IMF로 인해 경제가 어려워지자 이해가 안 가는 국민 대통합한다며 김대중이 모두에게 사면을 해주며 풀려난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걸까. 김대중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들과 경제, 국민 대통합과의 연계는 신박한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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