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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19. 2023

삶의 향수

조선의 옥주 사마소(司馬所)로 보는 고인 물의 폐단 

사람은 왜 조직을 이루고 단체를 이루려고 할까. 종교, 정치, 지역등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이루려고 하는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고 싶고 주장하고 싶은 바를 관철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가지고 싶은 마음이다. 똑똑하고 현명하고 누구나 보아도 탁월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끼리 모여서 단체를 이루고 지역에서 목소리를 내며 영향력을 미친다. 

조선시대 흔하게 선비라고 불리던 사람들의 기본적인 통과시험은 생원시와 진사시였다. 흔하게 말하는 장원급제는 이들 중에서 성균관에 입학하는 등의 과정을 지나 대과에 급제한 사람들을 말한다. 힘든 대과를 통과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생원과 진사에 머무르면서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다. 

지금보다 수도로 집중이 덜했던 조선시대에는 지방자치가 중요했던 시기에 생원과 진사는 각 지방 유지가 되어 가문을 이끌어갔다. 이들은 군역(軍役)이나 잡역(雜役)을 면제받았을 뿐 아니라 향촌 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며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지방에서 여론등을 주도하던 생원과 진사는 친목이나 학문 등을 위해 모였는데 그러다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지방통치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사마소라는 곳이었다. 노비도 보유하고 토지를 기반으로 재산을 늘리고 지방관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잡아들이고 벌을 주기까지 한다. 

초기에 사마소가 설립되었을 때는 그 의도는 권세가 있는 가문에 맞서 여론을 주도하고 지역의 필요한 것들을 위한 의견을 모으는 공간으로 활용이 되는 것이었다. 옥주 사마소는 효종 5년(1654)에 의창을 뜯어다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방에서 이 특수한 공간에 드나들 수 있는 생원과 진사는 관법(官法)을 침해하여 동요시키는 등 폐단이 많아 혁파해야 한다는 주장에 종종 휘말리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 생원은 진사보다 우대를 받았다. 쉽게 비교를 하자면 7급 공무원과 9급 공무원의 차이라고 할까.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 조선 후기에는 진사가 생원보다 더 우대를 받게 된다. 

옥천읍에 자리한 옥주사마소는 건물의 규모는 크지 않다. 한참 활성화되었을 때는 옥주 사마소에 속한 노비나 토지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던 사마소는 지역의 이권을 챙기며 압력 단체로 발전하면서 폐단이 훨씬 커졌다. 

생원은 진사와 더불어 3년마다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국가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수시로 실시하는 증광시(增廣試)의 소과(小科)에서 각각 100인을 뽑는 것이 정식이었다. 1894년 과거제가 폐지될 때까지 이들은 계속 배출되었다. 

과거제가 폐지된 1894년 이후에 조선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거의 배출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일본인들은 경성제국대학과 같은 고등교육기관에 조선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그리고 전문학교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지역의 여론을 만들고 이끌어가던 사람들은 불과 20~30년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광복이 된 이후에 경성제국대학과 전문학교들은 한국의 교육시스템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의 정점인 SKY로 남아 있다. 

살다 보면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이 모호해지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조직을 이루고 이권을 위해 다른 기회를 박탈하는 집단들을 보면 그들에게 옳음은 다른 사람에게 틀림이 될 텐데 그것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생원과 진사가 되어 지역에서 머물며 조정에 관여받지 않는 자치를 하려고 했던 공간 사마소에서 그 길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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