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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07. 2024

꿈꾸는 것에 대하여

길게 꿈꾸고 작은 것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어야 행복한 삶이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가지고 싶다는 것과는 다르다.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사회나 주변 혹은 자신의 욕심이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집값이 비싼 곳이 살기 좋은 곳에 대한 필요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는 없다. 좋은 직업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좋다라는 의미에는 남들이 보기에 좋다는 의미가 더 크다.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아도 남들이 보기에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인 여유등이 포함된 직업을 좋다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좀 시들시들해졌지만 시크릿과 비슷한 스타일의 자기계발서도 아닌 것이 셀프 최면술을 담은 책들이 수없이 쏟아졌다. 책들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대부분 과거와 현재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긍정적인 이면이나 혹은 개인적인 위기를 넘어선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분명하게 들이대고 있는 하나의 잣대는 경제적인 측면이다. 사람의 삶은 하나의 가치로 살아가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다던가 스스로를 해하면서까지가 아니라면 어떤 것을 추구해도 의미가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정말 원하고 꿈꾸는 것조차 알지 못한채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성과를 이루기를 강요받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삶이나 부를 부러워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래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그 시스템속에서 소수의 승자를 만들어가면서 유지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학벌이 사회에서 큰 의미가 없다면 사교육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풀어질 것이다. 스타강사라는 이름자체도 사교육의 카르텔에서 만들어지는 모습 아닌가.      


사람은 불안과 인정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물질적인 것을 추구한다. 사실 생물학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의미 없거나 쓸모없는 것을 사기 위해 혹은 보여주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어느새 나이만 먹어간다.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판단 기준을 깡그리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쉽지가 않다. 아니 쉽지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지배당하는 수준으로 살아간다. 헌법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개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는다.      

꿈이라는 것은 다양성이 있다. 다양성이 없어지는 꿈은 꿈이 아니라 자기 불신을 만들어낸다.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나 성공에만 국한된다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비난의 대상은 바로 자신이 된다. 더 절실히 원하지 않았기에 이루어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자책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의 목표치가 비교가 가능한 수치화로 이루어지면 결국 비교는 불가피하게 된다. 비교가 가능하게 되면 극단의 경제적 성공을 한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영원히 자신의 꿈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동일한 가치척도를 만드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꿈에 대한 수요를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의 이면이다. 자신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았거나 어디다가 사용할지도 모르는 돈의 수요를 강요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꿈이 사라지는 대신에 숫자에 대한 집착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언론과 TV에서 지속적으로 세뇌를 시키듯이 계속 주입하니 그렇게 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런 것을 더욱더 갈망하도록 만들어야 사람들은 돈을 쓰고 때론 사기의 늪에 빠지는데 안정적인(?)상태에 이르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승리 이후 물질적으로는 엄청난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만 도덕적, 윤리적으로는 타락한 미국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며 소위 아메리칸 드림의 타락과 절망을 담은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는 비교적 객관적인 관점을 가진 닉 캐러웨이(Nick Carraway)의 관점으로 풀어나가는 소설이다. 소설속에서 개츠비는 남들이 원하는 인생을 살려고 노력했지만 황폐한 물질문명속에 희생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인생은 길게 꿈꾸고 천천히 달리며 주변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지치지 않게 된다. 인생은 하나의 방법으로만 살아가도록 설계가 되어 있지 않다. 1막만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었던 20세기와 21세기는 다르다.  "미국인의 삶에는 오직 1막만이 있을 뿐 2막은 없다"는 개츠비의 말과 같은 삶이 아니라 길게 꿈꾸고 작은 것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어야 행복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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