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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12. 2024

부러움과 시기(猜忌)

부러움은 행동을 이끌고 시기는 생각을 고착화시킨다.

필자에게 가까운 사람 중에 시기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은 변화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은채 시기하는 것이다. 시기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있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만 거론하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위축감이 들게 하는 대화법을 주로 사용한다. 시기하는 마음에 주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잘 풀리지 않는 것에 자신이 나아졌음을 좋아하고 안도해한다. 자신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지만 다른 사람이 뒤로 쳐지면서 마치 자신이 조금 앞으로 나간 것처럼 좋아한다. 누군가에 대한 부러움은 자신에게 원동력을 만들어내지만 시기는 다른 사람에게 원망하는 마음만을 만들어낸다.      


부러움과 시기를 쉽게 풀어본다면 이렇다. 많은 사람들이 소고기를 좋아하지만 농업이 근간이던 시대에 서민들에게 소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다. 평범한 농가에서 소가 한 마리가 있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다. 모 개그맨이 했던 말처럼 소는 누가 키우냐는 말처럼 집안에서 소는 큰 자산이기도 했었다. 이웃집에서 소를 보유하고 있을 때 소가 있는 것을 부러워하며 열심히 소를 살 수 있는 돈을 모으는 사람이 있고 이웃의 소가 있음을 시기하며 병에 걸려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무언가에 대한 부러움은 자신을 다른 관점으로 보고 궁극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당신은 당신이 있는 곳에 있고, 남들은 남들이 있는 곳에 있다. 그게 전부일 뿐이다. 그토록 고군분투하는 까닭은 어떻게든 당신이 부러워하는 모습처럼 만들어진다는 혹은 머지않아 부러워하는 모습으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 반면 시기는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은채 혹은 노력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유형, 무형으로 주저앉히기 위해 저주를 퍼붓게 만든다. 남을 향한 시기심은 결국 그 힘이 역으로 자신에게 작용을 하게 된다. 그 마음은 있지도 않았던 샘하는 마음을 더욱더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타인에 대해 늘 관대한 사람조차 친한 지인의 성공을 축하해주면서 다른 마음에서는 순간적인 시기심도 고개를 치켜든다.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는 남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면서 ‘아싸~’라고 하면서 속으로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비중의 개념을 알았을테처럼 유레카(eureka)를 외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수준에 전혀 상관이 없는 연예인들의 이야기를 마치 단물이 빠질때로 빠진 껌씹듯이 질겅질겅 씹어가면서 이 사람 저 사람과 나눈다. 특히 이혼이나 자살등의 불행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마치 그들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 같지만 자신은 그런 화려한 삶을 살지는 못해도 그렇게 불행하지 않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시기의 다른 모습이다.      


부러움은 행동을 이끌고 시기는 생각을 고착화시킨다. 무언가를 시도해보지 않는 것은 실패자체가 아니라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저변에 깔려 있다. 영어에서는 시기에 가장 가까운 단어로 'envy'와 'Jealousy'를 들 수 있다. 영어사전에서는 'envy는 감탄과 부러움이 반영되어 적의를 품지는 않지만 'Jealousy'는 분개나 적의를 품는 단어로 구분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화에서 부러움과 시기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나올만한 할머니가 농부에게 말을 한다. 이 할머니는 알라딘에서 등장하는 지니보다 소원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소원을 단 한 개만 말할 수 있지만 그 소원은 반드시 이뤄주겠다. 단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네 이웃은 당신이 받는 것에 배를 받게 된다. 이 말을 들은 농부는 곰곰이 생각한 다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제 눈을 하나 멀게 해주세요.”      


자신이 이뤄놓은 것은 근면과 성실에 기반한 것이고 다른 사람이 이뤄놓은 것은 특혜나 꼼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상대방보다 못 가지게 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왜 그런 집에서 태어나서 그런 신체를 가지고 기회는 왜 불공평한지에 대한 이유를 찾기란 상당히 힘들다. 불분명한 시기와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기 보다는 왜 부러워했는지 이유를 찾고 그런 상태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는 것이 더 빠르다. 다음 삶을 잘 준비하고 살기 위한 자세로 부러워할 것인가 혹은 시기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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