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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13. 2024

곰돌이 푸, 피와 꿀

버림받은 남자가 살인을 정당화하는 느낌의 영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나오게 될 살인유형으로 스토킹 살인이 있다. 막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매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트리거가 되는 순간이 언제인지 아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톰크루즈 주연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처럼 살인이라는 그 광기를 예측할 수 없는 이상 일어나야 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는 상황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연인 간의 폭력, 부부간의 폭력 혹은 스토킹 범죄 가해자들의 특징은 모든 잘못을 상대에게 뒤집어씌운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는 자존감은 엄청나게 낮은데 소유하고 자신을 무시하고 버리는 것을 못 참은 자존심은 상당히 높다. 그런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폭력적인 모습이 연속적으로 찾아온다. 


곰돌이 푸, 피와 꿀이라는 영화는 동물을 콘셉트로 만든 하드고어한 영화지만 그 이면에는 그런 남자들의 소유욕, 살인, 버림받았다는 극심한 분노가 담겨 있다. 100주년이 된 디즈니는 매년 매우 교훈적이고(?) 진부한 영화를 내놓으며 관객들에게 외면(내 주식은 어떻게 하지?...) 받고 있다. 그 디즈니에서 만든 캐릭터 중에서 흑백의 미키마우스와 빨간 옷을 입은 귀여운 곰돌이 푸의 저작권은 모두 풀렸다. 즉 어떤 글을 쓰던 만화를 그리든 간에 사용해도 된다는 의미다. 그 푸를 악랄한 연쇄살인마로 만든 영화가 곰돌이 푸, 피와 꿀이라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디즈니가 고어한 영화는 아니더라도 색다른 시도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다시 마블의 세계관을 다시 만들어내기를 바라본다. 

꿀 같은 과거가 있었던 동물이 두 마리가 있었다. 곰돌이 푸와 돼지 피글렛은 새끼 때 아이였던 로빈에게 돌봄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행복한 시절을 보내며 평생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단. 푸와 피글렛은 갑자기 떠나버린 로빈으로 인해 매우 큰 심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여기서 스토킹 살인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스토킹 살인을 자행하는 사람(주로 남자)들의 특징은 스스로 이룬 것이 많지 않고 어릴 때 혹은 내면이 취약할 때 상처를 받게 된다. 문제는 그 상처를 스스로가 더 공격하고 더 키워서 스스로를 괴물로 만든다는 점이다. 푸와 피글렛은 살인적인 충동과 잔인성을 가진 곰과 돼지로 성장해 간다. 

로빈이 돌아오지 않으면 좋았으련만 성장하고 나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이 두 마리에게 잡히고 만다. 문제는 이웃에 살고 있던 여자와 그 친구를 보기 위해 놀러 왔던 여성들도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살인자들을 보면 트리거로 한 번 그 본성이 풀리고 나면 제약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분노의 대상과 상관없는 누구에게도 아낌없이 살인적인 애정(?)을 보여주며 살해를 일삼는다. 그런 폭발을 일으키는 트리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주로 사회적 제약이나 자신을 배신했다는 완전한 자각을 할 때 그런 경우가 많다. 

신당역에서 스토킹을 하다가 살인을 한 범인 전주환 역시 그 회사에 취직하기 전까지 딱히 주목받은 것이 없던 남자였다. 그러다가 한 명의 여자에게 꽂히게 되는데 그녀는 같이 서울교통공사에 입사했던 여성이었다. 코로나19로 이해 사람과 못 만나고 연애를 못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2019년부터 오랜 시간 스토킹하다가 결국 2022년 9월 14일에 일을 벌이게 된다. 대부분의 이런 형태의 살인자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을 경우가 많고 자신에게 더 잃을 게 없는 경우가 많다. 

영화 속에서 곰돌이 푸는 숲에서 완전한 고립이 된 동물이다. 돼지 피글렛 역시 곰돌이 푸에게 종속되어 있는 똘마니 같은 살인마다. 이 두 마리는 이제 이유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잔혹한 살인만이 그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살인자들에게 딱히 이유는 없다. 프로파일러가 투입되더라도 이유를 찾아봐야 어릴 때의 가정환경 혹은 사회적이  관계와 고립에서 발생하는 자기 파괴적인 본능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여성들에게는 죄는 없었다. 심지어 나중에 우연하게 찾아온 남자들도 곰돌이 푸의 엄청난 완력에 모두 살해당하게 된다. 곰곰이 돌아보면 죄라는 것에 대해 너무 객관화하는 측면이 있다. 죄는 사람마다 주관적으로 다르게 판단한다. 사람은 매우 이성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 같아도 매우 비이성적으로 세상을 보면서 살아간다.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행사하고 심지어 살인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돈을 버는 데 있어서 법적인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는 측면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저지르는 불법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 연인을 살해하고 나서 안마방에 가서 성관계를 하고 자다가 잡힌 남자도 있었다. 

일본에도 적지 않은 스토킹 살인이 발생했는데 1999년에 발생한 코마츠 카즈토가 이노 시오리를 살해한 사건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시오리가 자신을 배신하고 버렸다고 생각한 카즈토는 그녀를 천박하고 매춘을 일삼은 여자라고 주변에 퍼트리고 종국에는 자신의 형을 통해 청부살해까지 하게 된다. 카즈토는 형과 함께 성매매 업소를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까지 있었다. 


우리 주변에도 자신의 겉모습을 숨기기 위해 영화 속 곰돌이 푸와 같은 모습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점점 사람과 동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측면이 있다. 동물을 동물로 보지 않고 사람처럼 의인화하면서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나 사람인데 사람답지 못하게 행동해서 동물같이 변해가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어떤 것에서 인간다움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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