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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28. 2024

전략적 거점

임진왜란,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하였던 울주 서성포왜성

일본을 여행하면 가장 먼저 가는 곳 중에 하나가 후쿠오카나 히타시등이다. 그 도시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구마모토시가 있는데 그렇게 8개현으로 이루어져 있는 섬이 규수라는 섬이다. 일본 열도를 이루는 네 개의 섬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섬으로 9개의 주 혹은 지방(九州)을 뜻하는 규슈라는 지명은 봉건시대의 토지분할에서 나온 말이다. 그 섬의 중심의 구마모토시에는 구마모토성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왔던 가토 기요마사의 성이기도 하다. 가토는 일본군 2번대로 2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울주에 가면 서생포왜성이라는 곳이 있다. 출성술의 대가이며 칠본창 중 한 명이었다는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성이다. 경상 좌수영 소속 서생포 수군 만호진(水軍萬戶鎭)을 함락시킨 후, 이곳과 인근 숙마성에서 가져온 돌로 성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다. 울주를 여행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곳에서 부산이나 거제등으로 쉽게 접근할 수가 있다. 정유재란 때에는 북쪽의 울산왜성과 남쪽의 임랑포왜성, 기장왜성, 동래왜성과 더불어 부산왜성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중요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곳에서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에  울산왜성이 둘러싸여 공격을 받는다는 소리를 듣고 울산왜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구마모토로 여행을 갔을 때 본 구마모토성은 왜군이 철수하면서 서생포왜성을 쌓을 때 동원된 조선인을 일본으로 데리고 가 쌓는 데 동원하였다고 한다.

서생포왜성이 초축된 이후부터 정유재란까지의 증축 단계에는 1 구역의 고상건물지 1·2호와 2 구역의 기단건물지 1호가 수축(修築)되고, 우물 1호가 새롭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서생포왜성은 1594년(선조 27)년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카토 기요마사와 강화 회담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사명대사는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에서 무리한 조건을 제시하자 "옳은 일이 아니면 이로움을 찾지 말라... 진실로 내 것이 아니라면 비록 털 한올이라도 탐내지 말라."라며 강하게 말하였다.

이곳에서도 조금 더 걸어서 올라가야 서성포왜성에 도달할 수가 있다. 승려의 신분이지만 사명대사는 임진왜란당시 많은 활약을 하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마지막 4차 담판에서 가토가 그대 나라의 보배는 무엇이냐고 묻자 사명대사는 난리가 난 판국에 보배가 어디에 있는가며 오직 그대의 목이 가장 값비싼 보배로 여긴다고 답을 해주었다.

서성포왜성은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왜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성이다. 2011년의 발굴결과에서 1592년(선조 25) 7월부터 1593년(선조 26)까지의 초축 단계에는 1 구역 고상건물지(高床建物址) 1·2호, 주혈군(柱穴群), 2 구역 기단건물지(基壇建物址) 1호와 고상건물지 5·6호, 수혈(竪穴) 2호가 조성되었다. 1 구역 고상건물지 1·2호의 경우 주혈 사이의 간격은 남북 2m, 동서 4.8m로 모두 정면 열 칸, 옆면 남북 외측 두 칸, 내부 한 칸으로 조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리적으로 보아도 울산과 부산과 근거리에 있는 서성포왜성은 상당히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성 밖 동제당(洞祭堂)에는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마귀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마을의 주관으로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해발 133m 일원에 소재하는데, 동서 870m, 남북 370m 정도의 규모의 서생포왜성은 입지상으로 평산성(平山城)에 해당된다.  곽(郭)의 배치는 주곽인 본환(本丸)을 중심으로 곽을 붙여 나가는 제곽식(梯郭式) 성곽으로 분류되고 있다.

규슈의 구마모토성에 가보면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당시 활약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울산왜성을 비롯하여 서생포왜성에 대한 내용도 있다. 서생포왜성은 1963년 사적 제54호로 지정되었지만 이후 정부가 일제지정문화재를 재평가하기로 하면서 1997년 울산시 문화재자료로 격하됐다. 일본인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로 그들의 선조들의 유물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일본 성벽)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간은 지나고 과거의 아픔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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