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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25. 2024

원수의 이름으로..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 자신의 행동이 죽음으로 이끌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파급을 계속 고려하면서 사는 것도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을 올바르게 세우는 데 있다. 설사 그것이 권력과 돈으로 덮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모르는 일이다. 

대야성이 위치한 합천읍은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무문토기 편과 수혈 유구 등을 통해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인간의 생활터전이었음이 확인된 곳이다. 642년에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이 함락되고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이 그 처자와 함께 죽음을 맞으면서 백제에게 빼앗긴 것으로 잘 알려진 곳이 이곳이다.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 도독으로 부임한 뒤 부하인 검일의 아내를 빼앗아 원한을 샀다. 642년 8월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이끌고 와 대야성을 포위했다. 그때 검일이 백제군과 내응 하여 창고에 불을 지르니 민심이 흉흉해져 성을 지킬 자신감을 잃었다.

보좌관인 서천이 항복할 것을 권유하여 성 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이때 또 다른 보좌관인 죽죽 이 만류했다. 품석이 그 말을 듣지 않고 성문을 열어 군사들을 성 밖으로 나가게 하자 백제의 복병은 이들을 살해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처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그 뒤 죽죽 이 끝까지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성은 함락당했다. 윤충은 그의 목을 베어 사비성에 보내고 남녀 1,000명을 사로잡아 갔다. 품석 내외의 유골은 647년(진덕왕 1) 김유신(金庾信)이 사로잡은 백제 장군 8명과 교환되어 비로소 신라로 돌아왔다.

성의 북쪽을 제외한 삼면으로는 황강이 흐르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를 이루고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천연단애절벽이 형성되어 있어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합천 8경 중 제5경인 함벽루는, 고려 충숙왕 8년(1321년) 합주지주사 김영돈이 창건했으며 안진이 이 사실을 기문으로 적어두었다. 이황, 조식, 송시열 등과 같은 조선시대 최고 문인들의 글이 누각 내부 현판에 걸려 있으며, 뒤 암벽에는 함벽루라 새긴 송시열의 글씨가 있다.

성수 김품석이 살던 시대에는 지금과 많은 기준이 달랐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법과 윤리 또한 미래에는 많이 바뀔 수가 있다. 

대야성의 체성부는 대부분 훼손되어 성벽의 축조수법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다만 동쪽과 남쪽에 양호하게 남은 성벽이 일부 있고, 동북쪽은 대부분 붕괴되어 잔존 1~2단의 기단석이 남아 있다. 체성부의 잔존 높이는 1.5m 내외, 폭은 2.5m 내외이다.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체성부의 높이를 추정하면 약 4m 정도이다.

황강의 지류인 가야천(伽倻川)이 가야산에서 발원하여 남류하고 남부에는 남강(南江)의 지류인 양천강(梁川江)·단계천(丹溪川)·사정천(射亭川)·묘산천(妙山川) 등의 하천이 관내의 각 산지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합천군으로 1398년(태조 7) 강화도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대장경판(高麗大藏經板)을 해인사로 옮겼다.

해인사팔만대장경의 각인에 대해서도 신라 애장왕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번각(飜刻)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며, 가야산에 은거한 최치원에 관련된 신선승천전설등도 전해지고 있는 곳이 합천이다. 

서기 642년에 머리가 지금의 충남 부여로 보내졌던 김품석 내외의 유골은 압량주군주(押梁州都督) 김유신(金庾信)이 생포한 백제장군 8인과 교환되어 647년(진덕여왕 1) 돌아왔다. 자신의 사위와 딸을 잃은 것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절치부심하여 준비한 김춘추는 당나라의 연합을 통해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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