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탄역에서 내려 돌아보는 풍경과 또 다른 사육신 이야기
전국 묘목 거래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옥천 이원면에서는 매년 봄이 되면 전국에 나무를 심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나무라는 것은 뿌리를 내려서 그 땅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모든 사람들에게 성씨가 있듯이 뿌리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한국의 성씨가 5,000여 개가 있으며 그 지역마다의 이야기가 성에 붙어서 내려오고 있다.
이원면에는 영동과의 경계선에 지탄리와 백지리가 있다. 두 지역의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지탄역이라는 역을 이용했었다. 월이산 아래 금강이 흐르고 반대편으로는 평평한 논과 밭이 펼쳐지는 곳에 외딴섬과 같은 지역이 지탄리와 백지리다.
마을주민들의 힘을 모아서 만든 역이 바로 지탄역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지탄역은 1960년 5월 16일, 문을 열었으며 개역 5년 후인 1965년 12월 1일, 지탄역은 배치간이역(직원을 배치하고 여객 또는 화물을 취급하는 역)으로 승격됐다.
'명예역장제'는 무배치간이역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효율적인 역사 관리를 위해 코레일이 2009년부터 시행한 제도로 선발된 명예역장에게는 역장 제복과 신분증, 명함 등이 제공되고 이들은 무보수로 역장의 기본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한다.
지탄역에서 기찻길의 아래쪽으로 들어오면 옥천 김문기 유허비가 나온다. 김문기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를 받았던 사람이다.
김문기 유허비는 김문기가 태어난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 만들어져 있다.
백촌(白村) 김문기는 1399년 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태어났는데 2017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이곳에 충의사를 건립하고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단종 복위에 힘쓰다가 목숨을 잃은 충신 김문기를 기리는 추모제향을 하고 있다.
충의사가 있는 곳에서 위쪽으로 올라가 보면 김문기의 유허비가 나온다. 1430년 예문관검열, 1436년 사간원좌헌납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는 등 평탄한 벼슬생활을 하게 된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유시에 따라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공을 세웠다. 그 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지만 다음 해인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김문기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육신은 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 등 6인이며 김문기는 1691년(숙종 17) 국가에서는 육신을 공인해 복관 시켰고, 뒤따라 1731년(영조 7)에는 김문기를 복관하고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김문기는 삼중신(三重臣: 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김문기)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해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 문적을 널리 고증해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인 어정배식록에 의해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사람은 홀로 태어나지 않듯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역사가 모여 지금의 사회를 만들게 된다. 넓은 공터에 돌길을 내고 좌우에 얕은 향나무를 심어 비각으로 향하게 한 곳의 비석은 1804년(순조 4)에 세운 것인데, 1846년(헌종 12)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