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인가 했더니 봄이 내려앉은 함양의 일두 고택
러브가 생각보다 쉽다고 말했던 고애신은 시작이 반이라 생각했던 가녀린 몸이지만 가볍지 않은 품위를 보여주는 연기를 보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격변의 시간 속에 살았던 그녀는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가는 시대를 살았다. 그 누구도 변화의 시대에 홀로 독야청청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도 사랑과 따뜻함을 품을 수 있었던 그녀가 미스터 선샤인에서 고상완과 희진사이의 딸로 태어났다. 경상남도 함양군에 가면 일두 고택이라는 곳이 있다. 그 고택은 하동 정씨집 안의 집으로 고애신이 머무르기에 그런 좋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옛사람이지만 지금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생각이나 흔적을 걸어볼 수가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만날 수가 없지만 만날 수 있는 방법들은 그 사람의 행적을 따라가 보는 방법이 있다. 함양군의 일두고택은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정여창의 호인 일두(一蠹)를 그대로 붙여둔 것이다.
정여창은 어진 세상 즉 인정(仁政) 이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이다. 사림들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그를 도와줌에 있어서 큰 공을 세운 훈구대신들의 탐욕을 멀리하고자 했다. 세조의 주변에서 탐욕스럽게 많은 것을 가지고자 했던 그들로 인해 그 주변에 살던 백성들은 그 삶이 팍팍하기만 했다.
사대부 집안에 자란다는 것은 어릴 적부터 기본 소양과 함께 학식을 갖출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짐을 의미한다. 정여창의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이었으며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그가 일찍이 김일손과 친했던 것이 결국 자신의 명을 단축시키게 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시간이 뒤로 돌아간 듯이 이곳에 멈추어 서본다. 비가 내리다가 멈추어서 반갑기까지 하다. 불편한 것이 있어야 그것이 사라지면 편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성종대에 벼슬길에 오른 정여창은 불과 8년이 지나지 않아 연산군에게 큰 해를 입게 된다.
사약을 받고 죽은 폐비 윤 씨의 아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통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하기에는 대간들이 사사건건 문제를 삼았다. 왕이라 함은 모든 백성의 아버지이며 군림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던 연산군에게는 판을 뒤집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정여창과 같이 배움을 했던 김일손이 쓴 사초가 바로 문제가 되었다. 어떤 것은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 좌의정 훈구파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을 한 것을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살면서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가 있다. 김일손과 정여창은 매우 친분이 있었던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함양 일두고택은 조선 오현 중에 한 명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의 고택으로 현재의 집은 그가 죽은 후 선조 무렵에 건축된 것이라고 한다. 고택의 구조가 어유가 있으면서도 짜임새가 있어서 좋다. 이 고택은 지정 당시 명칭은 '함양 정병호 가옥'이었으나, 조선 성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일두 정여창(1450-1504)의 생가지에 후손들이 타계 1세기 후 중건한 가옥인 점을 반영하여 그의 호를 따라 ‘함양 일두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고택에는 솟을대문, 행랑채, 사랑채, 안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아래채, 광채, 사당등을 갖추고 잇다. 하동 정 씨의 면모를 고루 갖춘 경남 지방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정여창은 김일손과 지리산과 하동지역을 여행하다가 이런 시를 남긴다.
창포를 휘감는 바람 가볍고 부드럽네
사월 화개는 이미 보리가 익어가고
두류산을 두러 보니 온통 첩첩하네
외딴 배 내려내려 큰 강으로 흘러간다.
정여창이 원했던 사회는 언젠가 올 수 있을까. 인정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다스리는 사람의 도덕적인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흥청까지 설치하고 제대로 놀아보려던 연산군에게 사림은 눈에 가시였다. 어여쁜 흥청이 와 놀아대다 보니 나라가 망하는 망국에 이르니 이걸 흥청망청이라고 한다.
일두고택에 들어서서 세간살이가 있는 후손들의 방을 잠시 엿본다. 고애신이 겪었던 세상의 변화나 정여창이 겪었던 세상의 변화가 다를 것은 없었다. 급변하는 시대에 새로운 권력을 잡으려는 유자광은 김일손의 스승이 쓴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보게 된다. 그 내용은 항우에게 살해되었던 초회왕의 사례를 들어 세조의 계유정난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자광이 그 내용을 연산군에게 고해바칠 때 연산군이 할아버지를 비판하는 내용에 정말 흥분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피바람을 불게 만들어서 자신의 마음대로 국정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삼사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마음대로 조선조정을 움직이게 할 무오사화는 그렇게 일어나게 된다. 김일손과 표연말(表沿末), 정여창(鄭汝昌), 최부(崔溥) 등 김종직 일파 20여 명을 비롯해 모두 40여 명을 사형에 처하거나 유배시켰다. 정여창은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 다시 무덤에서 파헤쳐져서 다시 목까지 잘렸다. 정여창은 사후에 나주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상주 도남서원,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 도산서원, 종성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봄이 내려앉은 일두고택에서 문으로 빠져나가는 겨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