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산골 속에 자리한 화성에 자리한 홍난파의 가옥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 노래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듯하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꽃피는 산골이나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를 보면서 크지는 않겠지만 고향이라고 하면 봄에 피는 그런 꽃이 연상이 된다. 살던 곳에도 봄은 찾아오지만 고향에도 봄은 찾아온다. 고향의 봄은 유난히 따뜻할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고향에 대한 추억 때문일 것이다.
홍난파가 생의 마지막 6년을 보낸 집은 서울의 1930년대에 지어진 홍파동 언덕배기에 2층의 아담한 적벽돌 건물이다. 홍난파는 봉선화를 비롯하여 고향의 봄 등을 만든 작곡가지자 바이올리니스트로 현대음악의 개척자로 꼽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했던 그와 친일로 아프게 얼룩진 그. 두 시절 모두를 아우르는 음악가 홍난파의 궤적이기도 하다. 이번에 찾아간 곳은 서울이 아니라 화성에 자리한 홍난파생가다.
이곳에서 태어난 홍난파는 1898년 4월 10일 홍순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12년 YMCA 중등부를 졸업하고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양악부를 마친 뒤 동 전습소의 교사가 되었다. 현재의 생가 건물은 당초 멸실되었던 것을 1986년에 복원한 것으로 목조 초가 4칸의 ‘ㄱ’ 자형 구조이다.
생가는 소박하고 아담하다. 2개와 부엌으로 단출하게 구성된 집에는 아담한 마당이 딸려있고 건물 처마 밑으로 난파의 초상화와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을 찍어놓은 사진 몇 장이 이곳에 있다.
홍난파는 순수예술 잡지 '삼광'을 창간해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고 1937년 6월에 '수양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곳에 오는 길에 자세히 살펴보면 남양 홍 씨 집성촌을 연상케 하는 묘소들도 보인다.
홍난파가 살아생전에 어떤 활동을 했는지 사진을 통해 볼 수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안석주가 신문에 연재한 ‘악단인의 철상요태(凸相凹態)’에서는 서양음악 1세대인 김인식과 김형준을 비롯, 조선의 첫 피아니스트 김영환,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 테너 현제명, 바이올리니스트 최호영, 피아니스트 독고선 등 8명의 음악가들이 등장한다.
‘’ 빠요린’(바이올린)이 코주부들의 턱밑에 끼고 손가락을 떨어야 소리 나는 양국(洋國) 깡깡인 줄만 알고 일반이 신기해하던 시대에 먼저 ‘유모레스크’를 독주한 이도 씨(氏)인 만큼 악단에 있어서 선진인 씨(氏)다.’ - 안석주
피아노가 대구지역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했는데 바이올린은 또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연주할 때 자세가 우아하고 절도 있어 보이기에 특히 인기가 많은 악기인 바이올린은 유럽의 대표적인 찰현악기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바이올린은 에라스모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바이올린은 특히 악기 가격에 상한이 없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나무 공예품이다.
화성시에서는 작년 제4회를 맞이하는 홍난파합창단 연주회인 겨울밤 아름다운 동행이 열리기도 했었다.
홍난파가 작곡한 봉선화는 1920년 32세 때 작곡한 곡으로 본래는 기악곡(바이올린)이었다고 한다. 난파라는 호를 부친이 지어주었다고 하는데 그의 집이 음악적인 가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난파는 언덕에 핀 난초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금 이때는 봉선화의 가사처럼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러운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볼만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