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이 피기 전에 찾아온 봄향기가 가라앉은 정읍 전봉준 생가
자신의 땅이 있거나 누군가의 땅을 일구는 소작농으로 한 집안을 먹여 살렸던 그때 집에 세 마지기의 땅은 작기만 했다. 지금으로 보면 600평에서 나오는 먹거리가 얼마나 있겠는가. 전봉준은 넉넉하지 않은 그냥 시골에서 태어나 이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아버지 전창혁의 자라났다. 전봉준은 천안 전 씨 시조인 전섭의 후손이라고 한다. 150cm 정도의 키에 불과해서 녹두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고부마을에서 서당을 운영하고 한양방을 차려 한의사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정읍에는 전봉준의 생가가 복원이 되어 있다. 이 부근에서 생활을 하며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성장했으며 이들의 삶에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전봉준의 생가 혹은 유적의 옆에는 문화해설사가 머무르는 공간이 조성이 되어 있다. 녹두꽃은 보통 6월에 심어 재배하는데 녹두꽃은 한 달이 조금 지나면 꽃이 피기 시작한다. 흔하게 말하는 녹말가루는 바로 녹두로 만든 것이다. 녹두를 물에 불려 껍질을 제거한 뒤 맷돌에 갈아 체에 거리기를 반복하여 모은 것이 녹두 분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일이다.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고 나서야 다양한 관점과 세상을 보는 눈이 생겨난다. 전봉준이 보았던 세상은 팍팍판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전봉준은 동학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평온하게 보낼 수가 없었던 세상에서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특히나 두드러졌는데 조병갑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에게 부조금으로 2천 냥을 모아 오라는 지시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현이 마을 대표로 항의하다가 조병갑에게 매를 맞아 죽게 된다.
아버지가 매 맞아 죽고 백성들을 동원해서 정읍에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건설하였는데 오히려 백성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물을 쓸 때마다 과도한 물값을 요구했다. 결국 분노한 전봉준은 농민을 모아서 1894년에 민란을 일으켜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관아를 습격해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미 앞서 나서게 된 전봉준의 삶이 평탄할 수는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내고 싶었던 전봉준의 삶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못했다. 시대가 한참 흘러 복원된 전봉준의 생가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에서의 봄은 그냥 시간이 되면 찾아오게 될 것이다.
전봉준과 농민의 요구를 들어주던 척을 했던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이에 텐진 조약을 핑계로 다시 파병한 일본군이 조선 땅에 들어오면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패권을 쥐게 된 일본군은 북상하는 동학 농민군을 공주 우금치에서 조선 관군과 함께 몰살하다시피 전멸했다. 다시 재기를 꾀했지만 전봉준은 잡혀 사형을 선고받고 바로 다음날 새벽 서울의 인왕산 아래 무악재역 부근에서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방에 들어오니 따뜻하지만 소박한 꿈을 꾸었으며 청포장수의 이야기를 했던 전봉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청포는 맑은 빛을 지닌 녹두묵이다. 채 썬 청포묵은 서인, 붉은 소고기를 뜻하는 남인, 동인의 미나리, 북인의 검은 김이 합쳐져서 얼러진 세상을 원했던 영조의 탕평채는 그렇게 탄생했었다.
정읍 전봉준 유적(井邑 全琫準 遺蹟)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 있는 , 녹두장군 전봉준이 동학 농민 운동에 앞장서던 때 살았던 집을 복원한 유적이다.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40 남짓한 세월을 살았다.
전봉준의 생가 앞에는 오래전에 사용했던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물이 마르지 않았지만 그 물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시대 작고 아름다운 파랑새조차 녹두꽃에 앉아 꽃이 떨어지면 녹두가 덜 열리니 청포장수가 좋았을 리가 없다. 올해 여름 녹두꽃이 피게 될 전봉준의 봄은 그렇게 올해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