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사철 젊고 고귀함을 유지한다는 청송심 씨 고장의 찬경루
그녀가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고귀하면서도 사람을 품는 능력이 남달랐다고 평가받는 사람이 있다. 남편이었던 세종이 가장 큰 신뢰를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역사상 재능이 많았던 아들들을 낳았던 여성이기도 했다. 한양을 뒤엎을만한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도 몸소 지휘해서 창덕궁과 종묘를 무사히 지켜낸 그녀의 이름은 청송 심 씨인 소헌왕후다.
사과로 잘 알려진 고장 청송군은 이름부터가 맑은 느낌이 드는 고장이다. 그 지명은 조선조 세조 때 송생과 안덕현을 편입 합병하여 청송도호부로 승격될 당시 이전의 지명이다. 청송의 청이라는 의미는 푸른색, 봄, 동쪽, 젊음을 상징한다. 딱 이맘때 방문하면 좋을 여행지와 누각이 청송의 찬경루다.
이곳에 오면 청송 심 씨와 관련된 지명과 이야기가 곳곳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청송 심 씨인 심덕부는 고려말에 위세가 당당했던 군벌이었다. 고려말에 최영, 이성계와 더불어 고려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이성계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위화도 회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조선 건국 후 회군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가문의 영광은 왕조에 드리워질 정도였다.
청송심 씨 시조 심홍부(沈洪孚)의 재각(齋閣)인 찬경루 뒤에 위치하고 있는 건물은 운봉관이다. 청송군 객사의 일부로, 1428년(세종 10)에 군수 하담(河澹)이 찬경루(讚慶樓)와 함께 건축한 것으로 1600년대, 1717년(숙종 43), 1812년(순조 12)에 각각 중건되었다. 그 자체로 멋들어진 이 건물은 배면의 주상 공포는 제공살미가 매우 길게 돌출되어 연꽃과 연봉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그 위세를 더하고 있다.
심덕부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들은 모두 조선왕조에서 막강한 입지를 보여주게 된다. 왕의 권위를 넘어설 정도로 청송 심 씨 가문은 절정을 다했는데 특히 다섯째 아들인 심온의 딸이 충녕대군과 혼인하여 경숙옹주에 봉해지고 이어 충녕이 세종에 오르자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너무 밝게 채워진 달은 기운다고 했던가. 물론 이곳의 분위기는 야경만큼이나 아름답고 분위기가 좋다. 찬경루는 1428년(세종 10)에 창건하였으나 그 뒤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792년(정조 16)에 재건하였고, 그 이후 수 차례 중수가 이루어졌다.
용전천의 북안 암반 위에 남향하여 찬경루가 있고, 그 바로 후방에 운봉관이 서남향으로 앉아 있는데 운봉관은 잡석을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기둥은 대체로 좌측 반은 각주를, 우측 반은 원주를 사용하여 만들어두었다.
이곳에 자리한 건물들은 모두 세종대에 건립이 되었기에 청송 심 씨 그리고 소헌왕후와도 관련된 흔적들이다. 청송 심 씨들의 세력을 어떻게든 눌러야 할 필요가 있었던 태종은 사돈 가문을 숙청할 계획을 세운다. 태종의 마음을 읽은 박은이 실무적인 주도를 하여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을 숙청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야사에서는 심온이 반남 박 씨의 가문과는 혼인하지 말라는 남겼다고 한다.
소헌왕후의 처가는 아버지가 숙청되고 그 형제들도 귀양을 갔으며 어머니는 관노로 전락하였다. 그녀는 내명부를 잘 통솔하였으며 왕실의 살림을 잘 이끌었다. 해가 저물었어도 소헌공원은 분위기가 좋다. 이곳이 소헌공헌으로 바뀐 것은 2011년으로 찬경루·운봉관 사적공원(가칭) 명칭을 소헌공원(昭憲公園)으로 바꾸게 되었다.
청보의 靑자를 따고 송생의 松자를 따서 청송이라 이름하게 된 청송군(靑松郡)의 소나무 송은 절조, 장수, 번무를 상징한다. 청송군은 슬로시티와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도시, 산소 카페를 지향하고 있다.
할아버지대부터 아버지, 딸로 이어졌던 청송 심 씨의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용전천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세워진 규모가 큰 누각은 조선초 왕후를 배출한 심 씨 가문의 위세뿐만이 아니라 청송을 대표하는 성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