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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5. 2024

제도의 붕괴

삼일절 105주년 청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손병희 생가 

모든 것이 변화하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붕괴되는 것은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다. 조선말에 수많은 사람들은 국가제도에 많은 의문을 품었다. 이미 신분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국가재정은 바닥이 난 상태에서 국가를 존속시킬 동력원은 사라진 상태였다. 국내와 해외등에서 배워서 깨우친 사람들은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청주를 대표하는 충절지사로 권병덕, 신규식, 신석구, 한봉수, 손병희, 신홍식, 신순호, 이국영 등의 인물이 있다. 3월은 105주년을 맞이하는 삼일절이 있는 날이다. 손병희의 생가가 있는 곳을 찾아가 본다.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청주 관아의 서리인 손의조와 경주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난 손병희는 조선의 사회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동학운동이 불을 지피고 있을 때 손병희도 22 때 동학에 입교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 때는 통령으로서 북접(충청 이북지방)의 동학혁명군을 이끌고 남접의 전봉준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교주 최시형을 호위하면서 원산, 강계 등지로 은신하게 된다. 

동학의 목적이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 지상천국건설(地上天國建設)에 있었다. 손병희는  동학농민운동 실패 후 정부로부터 자신에 대한 체포령이 지속되고 동학에 대한 탄압이 수그러들지 않자 세계사정을 살피고 동학교단 재건 구상을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에 대한 이상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손병희는 1901년 동생 손병흠, 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오사카(大阪)에 머물렀다가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다. 

손병희 생가가 있는 곳은 현재 생가만 단독으로 있지만 과거에는 이곳에 마을이 있었을 것이다. 손병희는 일본등에 머물면서 교육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오사카, 교토(京都), 나라(奈郞), 고베(神戶), 도쿄(東京)에서 머물렀던 손병희는 새로운 근대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두 차례에 걸쳐 교인 자제 중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 교토와 도쿄 유학을 주선하기도 했다. 

손병희는 종교와 교육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고 했었다. 그는 문명을 받아들이고 본격적인 변화를 꾀하려고 하였다. 전국에 390여 개의 지회 조직을 비롯해 30여만 명이 검은 옷(黑衣)을 입고 단발(斷髮)을 실천하자 세상은 깜짝 놀라게 된다. 

손병희 생가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에는 새싹이 올라오는 것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생가를 둘러보고 손병희의 사당으로 발길을 해본다. 

손병희가 생각했던 세상은 여러 이해단체들이 얽혀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  동학교단은 친일세력이라고 인식되어 함경도 일대에서는 의병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국내에서 흑의 단발을 통해 근대문명을 수용하고자 하였던 혁신운동 역시 실패하였다. 

사당에는 손병희의 초상이 걸려 있다. 손병희가 태어난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는 1961년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하기 위해 충북 문화재보존회에서 유허비를 건립하였으며 1971년에는 그의 생가를 복원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학은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근대적 종교의 틀을 갖추게 된다. 손병희는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무오독립시위운동을 1918년 9월 9일로 정하는 등 준비를 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추진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다가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승하하자 만세시위를 보다 구체적으로 추진하기로 한다. 기독교, 불교, 천도교, 학생계등의 연합전선이 형성이 되었으며 1919년 2월 20일 권동진 집에서 민족대표는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33명으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준비된 독립운동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신문과정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으며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3·1 운동 직후 체포되어 3년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하던 중 1921년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상춘원에서 1922년 5월 19일 향년 62세로 서거하였다.

그의 삶은 1882년 22세 때 동학에 입교한 후에 192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회의 변화와 독립을 향한 발걸음으로 40여 년의 세월로 말할 수 있다. 

청주시 우암산에 가면 삼일공원이 조성이 되어 있는데 그곳에 가면 그의 동상을 볼 수가 있다. 삼일절이라는 하루의 민족의 큰 운동이었지만 그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있다. 이날은 손병희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105주년의 시간을 기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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