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하게 만난 풍경 속에 자리 잡은 함양 누각 광풍루
함양군은 자연이 살아 있는 대표적인 명승지를 품은 지역이다. 관광 명소이자 주민 쉼터인 상림·하림 공원과 각종 생활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함양은 광주∼대구 고속도로와 통영∼대전 고속도로가 분기하는 경남 서부권 도로교통의 요충지다. 행정구역은 함양읍과 마천면·휴천면·유림면·수동면·지곡면·안의면·서상면·서하면·백전면·병곡면 등 10개 면으로 이뤄져 있는 가운데 안의면이 가장 인구가 많다고 한다.
함양군의 안의면이라는 지역은 남동부를 흐르는 지우천 등의 소하천 연안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분포하며, 남부의 남강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한 곳이다.
함양군도 올해 비싸다고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과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함양군에 근무했던 사람으로 연암 박지원이 있다. 박지원은 함양군으로 온 것이 바로 안의면에 현감으로 온 것이었다. 박지원은 처음 이곳에서 물레방아를 만들어서 시험 가동을 해보았다.
함양군의 중심이라면 위풍당당하게 세워져 있는 광풍루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광풍루는 1412년(조선 태종 12년) 당시 안의 현감인 전우가 창건해 '선화루'라고 부르다가 1425년(세종 7년) 김홍의가 옮겨지었다. 1494년(성종 25년)에 안의현감 정여창이 손을 보고 현재 이름으로 불렀다.
박지원은 실학자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는데 실학이라는 것이 별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실생활에 필요한 것이면 접목해 보고 시도해 본다는 의미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이 학문의 본질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경남 함양 안의면은 안음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중국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물건들을 목격한 박지원은 물레방아가 힘을 들이지 않고 바퀴를 돌릴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전력을 생산하기 위한 수력발전소와 개념은 비슷하다.
광풍루가 있는 곳은 탁 트인 곳에서 휴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을 해두었다. 거센 물살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흘러간다. 물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는 것이 물리적인 법칙이며 자연의 흐름이다.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새순이 돋아나는 시기에 와있다. 소를 이용해서 연자방아를 찧다가 새롭게 만들어진 물레방아를 통해서 곡식을 탈곡하고 노동력을 최소화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였다.
광풍루가 자리한 곳에는 이곳을 거쳐갔던 사람들에 대한 비가 세워져 있다. 광풍루는 이곳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에게 휴식공간을 주었던 건물이기도 하다. 정면 5칸, 측면 2칸 이층 누각인 광풍루는 5량 구조 팔작지붕 겹치마 목조 와가로 지어졌으며 우람하고 위풍당당한 위용이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대표한다는 평가를 받는 광풍루는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1602년(선조 35) 심종진이 복원했다. 1605년 현감 장세남이 고쳐지었다.
안의 광풍루가 자리한 곳에 흐르는 강은 남강이다. 진주에서 항상 보았던 남강이 이곳 함양에도 흘러가고 있다. 안의에는 갈빗집이 유명한데 안의시장에서 적지 않은 소가 유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레방아는 사실 그 이전부터 있었지만 방아와 연결시킨 형태는 박지원이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최초의 물레방아가 만들어진 곳이 함양군이라고 알려져 있다. 디딜방아는 사람이 방아다리를 밟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력이 많이 들어간다. 물의 낙차를 이용해 가동되는 물레방아는 세탁기를 만들어서 가사노동에서 벗어난 현대기술과 비슷한 느낌까지 든다.
안의면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다시 위풍당당한 광풍루를 본다. 함양군에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이 함양 태수로 재직할 때 자주 올랐다고 알려진 함양읍의 학사루도 있다. 상림 숲에 있는 함화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8호)는 조선시대 함양읍성의 남문과 안의 강변의 안의광풍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