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회를 어떻게 왜곡해서 바라보고 있는가.
대중들은 문제의 본질을 볼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똑같은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누군가를 비난함으로써 그걸 빨리 잊어버리려고 한다. 주변 사람들한테 이야기해 봐도 복잡한 문제는 웬만하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강력범죄등의 문제가 발생하면 비난할 사람을 빨리 찾아내서 죽일 사람처럼 좌표 찍기를 하면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착각을 하고 살아간다. 즉 자신만 아니면 되며 강력범죄가 생겼을 때 왜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하기 싫으니 죽일 사람 한 명을 좌표 찍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난 5월 서울대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A 씨가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의 한 건물 옥상에서 20대 여자친구에게 여러 차례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했다. A 씨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던 사람이다. 학벌이 괜찮은 사람이 강력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런 범죄가 발생했을 때 왜 그랬을까를 대신 고민해 준다. 수능만점에 의대까지 다니던 학생이 왜 그랬을까를 공감해 준다고 할까. 마치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랬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는 의미다.
8월 서울 중구 숭례문 인근 지하보도에서 70대 남성에 의해 살해된 60대 여성 청소노동자가 있다. 피의자인 70대 남성은 노숙인으로 추정하면서 노숙자들에 대한 혐오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 서울대생이 살인을 했다고 해서 서울대생이 전체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노숙자 중 한 명이 살인을 했는데 노숙자 전체가 지탄을 받는 것은 우리가 사회를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서울대생은 실력과 노력, 노숙자는 사회 부적응자이기에 노숙자는 이해할 필요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은 단순하게 받아들여도 좋지만 어떤 것은 논리적이면서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살아온 방식대로 바라보는 것은 왜곡을 만들어낸다. 노력의 방식은 여러 가지로 드러나는 것이지 특정계층이 만들어낸 기준에 의해 평가받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다른 사람이 우러러볼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려는 것이 사람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거나 그들만의 리그가 공고한 강자를 볼 때는 개별적으로 판단하고 발언권이 약하거나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 전체적으로 판단을 한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를 분출할 기회를 찾는다. 어떤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간에 상관이 없다. 집단광기에 휩싸일 일만 일어나면 된다. 지난달 29일 영국 리버풀 인근의 한 댄스 교실에서 벌어진 흉기 난동으로 어린이 3명이 숨졌는데 사건 직후, 흉기 난동범은 '무슬림 망명 신청자'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온라인상에 퍼지면서 극단적인 폭력시위가 일어났다.
아무것에나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저변에 확대되어 있는 가운데 극단적인 결정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하나의 일이 일어날 때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서 일어난다. 아무리 이유가 없어 보이는 사건들도 인과관계는 있다. 더 많이 왜곡하고 사람들을 구분하고 차별을 만들고 있는데 그런 강력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많아야 한 명의 아이를 낳고 부모는 대부분 맞벌이와 소통을 하지 않고 자라난 세대들이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있을 수 있을까.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황금만능주의가 더해지고 어떤 식으로든 성공을 하는 것이 지향할만한 삶이라면 노력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달러가 여전히 패권을 가지지만 그 가치보다 원화의 가치는 더 빨리 떨어지게 된다. 1944년에 1온스(28.25g)에 35달러 했던 것이 2024년 8월을 기준으로 2,470달러쯤 되었다. 단순 계산으로 70배 정도가 올랐다. 사실 금이 오른 것이 아니라 달러가 그만큼 가치가 낮아진 것이다.
돈이 과도하게 풀린다는 것은 불평등이 더욱 심화된다는 의미다. 가만히 있어도 개개인의 구매력은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 화폐가치가 하락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일부 스포츠인이나 연예인의 경우에는 마치 물건의 가치가 낮아지는 디플레이션의 효과를 느낄 수는 있다. 우리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나서야 사회적 약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만 딱 그때뿐이다. 서울대 재학생의 살인이나 노숙자의 살인이나 개별사안일 뿐이다. 어떤 사건을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사안이 왜곡이 될 뿐이다.
누구나 쉽게 사랑을 말하고 공존을 말하며 공감을 이야기하지만 실상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매일매일 쉬지 않고 사건사고가 터지니 이제 웬만한 사건에 대한 뉴스는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하다. 강력사건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자신의 일이 아님임을 안도하면서 매도할 대상을 찾는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불행과 혐오를 에너지로 살아가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주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