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독도로 가기 위해 순풍을 기다리며 함께하던 대풍헌
지금도 울릉도나 독도를 가기 위해서는 날이 좋아야 한다. 바람이 적게 불어야 하고 태풍이나 기상상황이 악화되지 않아야 안전하게 섬에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얼마나 더 접근하는 것이 어려웠을까. 중앙정부에 자원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지방관으로 파견을 나갈 경우 그 지역의 자립도에 따라 근무할 수 있는 여건도 달라졌기 때문에 많은 관리들이 선호하는 분야도 달랐었다.
울릉도·독도를 순찰하기 위해 떠나는 수토관 일행의 제반 준비를 해당지역인 강원도 동해안에서 모두 부담하고, 순풍을 기다리는 수토사 일행들의 유숙 경비를 대풍헌 인근 주민들이 부담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그 공간이 지금도 울진에 남아 있다.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바닷가에 야산을 등지고 가옥 형태로 서 있는 대풍헌(待風軒·경상북도 기념물 제165호) 은 삼척·울진 등지의 관원들이 울릉도를 수토하기 위해 떠나면서 항해에 적당한 바람을 기다리던 곳이었다. 이곳에는 그 역사에 대해 접해볼 수 있는 수토문화전시관이 연 것이 2020년이다.
필자가 대풍헌을 처음 방문한 것이 2017년이었으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 대풍헌은 ‘바람을 기다리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수토사의 임무는 당시 거주가 허락되지 않았던 울릉도에 몰래 들어가 사는 주민을 수색하는 것, 일본인의 불법 어로활동을 살피는 것, 울릉도 지세를 조사하고 토산품과 산삼을 채취해 진상하는 것 등이었다고 한다.
조선의 수군은 동해안보다는 충청남도 전라도, 경상도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 동해안은 바다가 깊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다른 바다보다는 항해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수군의 진지는 많지가 않았다.
수토사는 해안경비부대 지휘관 격인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번갈아 맡았었다. 대풍헌은 정면(남쪽) 4칸, 우측면(서쪽) 4칸, 좌측면(동쪽) 3칸의 일자형 팔작집으로 동해안 해변의 작은 포구 구산리 마을 중심부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특유의 배인 판옥선에 80∼150여 명에 달하는 군사와 포수, 기타 인력을 이끌고 항해에 나선 수토관들의 여정은 항해에 적당한 바람을 기다리는 일정 등을 고려할 때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울릉도와 독도로 떠나는 여정은 마치 목숨을 건 하나의 임무처럼 받지 않았을까. 바다라는 미지의 공간을 가면서 어디로 가게 될지도 모르고 바람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곳까지 가는 여정이 험난하기만 했었다.
2∼3년에 한 번씩 조선의 수토관들이 울릉도·독도로 출발했었다. 지금도 독도를 가기 위해서는 1년에 기회가 주어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울릉도까지 어떻게 갈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독도는 또 다른 여정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로 자리 잡고 있는 섬은 바로 독도다. 언제나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면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닌 울릉군에 속한 섬으로 천연기념물 제336로 지정되어 있다. 바다를 보며 대풍헌에서 머물면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기다렸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