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방문하면 좋을 경북독립운동기념관과 고산정, 농암종택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문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지만 평생에 걸쳐서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어떤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아는 것은 올바른 가치관을 어떻게 세우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조선시대에 일반백성은 양반들에 비해 교육의 기회가 상당히 적었으며 먹고살기가 바빴기에 세상의 변화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개개인에게 주권이 있으며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폭발적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2024년도 이제 30일이 남지가 않았다. 30여 일도 남지 않은 가을의 어느 날 경상북도 안동에 자리한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을 방문해 보았다. 안 동하면 고택과 도산서원 그리고 하회마을등으로 유명하지만 가볼 만한 곳으로 경북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경북독립운동 기념관도 추천해 본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을 처음 방문해 본 것도 벌써 5년도 넘게 지났다. 오래간만에 찾은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는 삼일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상징 조형물인 염원의 발자취라는 상징물이 세워져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은 1919년 4월 11일이었다.
경북이라는 지역은 한국독립운동이 처음 일어난 곳이며 전국에서 자정순국자가 가장 많은 곳, 전국에서 독립유공자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의병들의 깃발이 올려진 것에 대한 역사를 만나볼 수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전기의병으로 문경의진, 예천의진, 영주의진, 풍기의진, 순흥의진, 안동의진,예안의진, 봉화의진, 영양의진, 의성의진, 청송의진,진보의진, 울진유진소, 평해유진소, 영해의진, 영덕의진, 감산의진, 경주영합의진 등이 있다.
의병들이 본격적으로 탄압받게 것은 1907년이다. 헤이그 밀사 파견을 빌미로 삼아 광무황제를 퇴위시켰을 때 본격적으로 의병 탄압이 나서게 된다. 항전으로 맞서던 수많은 의병들이 현장에서 희생되었고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로 망명하거나, 비밀조직을 만들어 항쟁을 이어갔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는 박열의사에 대한 이야기가 현장처럼 재현이 되어 있다. 박열과 그의 연인인 가네코가 일본 재판을 받는 장면이다. 박열은 항상 당당했는데 천황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도 여론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가 요구한 것 중 두 가지는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때문에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박열의 동료들에게 말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뭐든 우리 두 사람을 비웃어도 좋다. 그렇지만 이것은 두 사람의 일이다. 재판관에게도 말한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한다. 설령 재판관들이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해도 나는 당신을 결코 혼자 죽게 하지는 않겠다.’ - 가네코 후미코
한반도에서 독립운동을 하기가 힘들어진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넘어갔다. 1940년 창설된 한국광복군에 참가한 경북인은 전체 광복군의 10%인 약 80명 정도였으며 미국 OSS 부대와 합작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사회변화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경북은 유학의 전통이 강하여 계몽운동이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백성은 나라의 부인이며 백성이 강하면 나라가 강해지고 백성이 약하면 나라가 약해진다고 했다.
미국등으로 이민해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미주지역 노동이민은 1903년 1월 13일 102명의 한인들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하와이 노동 이민자는 7,5000여 명이었고, 이중 경상도 출신은 676명이었다고 한다.
해외로 나갔던 한인들은 조국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사과로 유명한 지역이 경상북도이기 때문에 경북 독립운동기념관을 방문하고 안동에 가볼 만한 곳인 미스터 선샤인의 촬영지 고산정으로 향하는 길에 익어가는 사과를 만나볼 수가 있었다.
안동 고산정은 여행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지만 홀로 생각하면서 찾기에 좋은 곳이다. 사랑의 물그림자가 있다면 안동 고산정만 한 곳도 없을 듯하다. 탁 트인 곳에서 그냥 가만히 멀리 있는 정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진다면 그걸로 족한 가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안동의 고산정은 상류에서 바위가 부서지고 돌멩이가 되어 결국 모래가 된 백사장 같은 곳의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다. 대단한 일상은 아니더라도 이 순간을 마음에 담고 가면 그것만으로 좋은 때다.
고산정은 어간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 우에 온돌방을 꾸몄는데 좌측방은 통간으로 하였으나 좌측방은 뒤쪽의 1 칸만을 온돌방으로 만들어두었으며 정유재란 시 안동 수성장으로 활약하여 좌승지에 증직 된 바 있는 성성재 금난수(惺惺齋 琴蘭秀 1530∼1599) 선생의 정자가 고산정이다. 왜란에 맞섰던 사람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고산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택의 미학이 있는 농암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고택의 미학이 잘살아 있는 이 종택은 1504년(연산군 10년)에 사간원 정언으로 연산군에게 옳은 말을 했다가 안동으로 유배된 이현보의 종택이다.
자연과 벗 삼아 예술에 취하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이 선비의 절제 덕목에 흠이 되지 않듯이 이렇게 여유를 누리는 사치도 허락되어서 가을의 분위기를 만끽해 본다.
산하와 강을 배경으로 한 멋진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농암종택은 낙동강 상류 청량산 자락,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하고 있는데 가송리는 佳松-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경상북도 안동이라는 지역은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그 뿌리가 된 것이 바로 전통마을이다.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마을의 대부분은 유서 깊은 양반 가문들로 이들은 기존에 지녔던 부와 명예를 독립운동에 바쳤다고 한다. 옛날의 영화는 이제 사라졌지만 그 뜻은 남아서 이렇게 방문하는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