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의 환경에서 나온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생각의 단절
고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의 감도는 다르다. 고통의 감도가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 자체가 다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약간의 고통에도 쉽게 굴복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죽음의 앞에 있더라도 자신이 생각한 길을 포기하지 않기도 한다. 수많은 책을 읽어보고 50년 이상의 삶을 살면서 드는 생각은 풍파에 휩쓸리지 않아 본 사람은 약간의 위협이나 고난에 쉽게 바뀐다는 것이다. 아주 풍요롭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삶에서는 자신만의 자세는 유지할 수 있어도 위협에서는 고귀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과연 진보한 존재인가를 보면 거의 그렇지 않다. 기술만 발달했을 뿐 사람들의 정신은 과거에 머물러 있으며 대한민국 헌법의 기치아래 살고 있을 뿐이다. 탐욕스러운 마음도 있으며 그걸 위해 전혀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걱정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그 막다름을 모르고 힘겹게 살아온 이들은 그것으로 인해 더 탐욕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왜란이 일어난 혼란의 시대, 함께 자란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와 그의 몸종 ‘천영’이 ‘선조’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으로 적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그렇게 잘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와 가진 것 없이 살아온 사람이야기가 얽힌다. 사람들은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정치인은 많지가 않다. 가진 것이 있는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고 없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오르면 더 탐욕스러워지니 말이다.
사람을 구분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위기 속에서 그 사람이 취한 행동이다. 정여립은 대동계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 임금이나 백성이나 다 같다는 것이 대동의 세상이다. 선조는 조선후반의 가장 최악의 선택을 했던 임금이었지만 그로 인해 이순신과 같은 신화를 만들었으며 백성들이 자신들의 자립을 생각하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은 백성들이었다. 그걸 지키기 위해 일어났던 사람들은 거의 자신들의 희생을 인정받지 못했다. 역사는 반복이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지금까지 우리는 진보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여전히 우매한 사람들이 있으며 돈을 위해서는 타인의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시로 만든 옷은 입었으냐 나일론으로 만든 현재적인 옷을 입었느냐의 차이뿐이다.
TV에서 혹은 영화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이면을 본다면 그들은 전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전란은 전쟁과 반란에 대해 그린 영화이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의 신뢰를 말하며 기득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동행이 가능한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