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이 머물고 신립이 죽었으며 백석의 시가 있는 탄금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항상 좋은 방향으로 가지만은 않으며 새로운 변화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가 있다. 변화에는 좋고 나쁨이라는 것이 없다. 그냥 그렇게 일어날뿐이다. 우륵은 가야국의 마지막 예술가이며 음악인이었던 사람이었다. 가야국이 사라질 때 악성 우륵은 신라에 귀화하였는데 진흥왕에게 명성이 열렸다. 그리고 왕은 우륵의 음악에 감동하여 대문산(大門山)을 중심으로 남한강 상류와 달천(達川)이 합류하는 지점에 살게 해 준다.
그렇게 신라로 귀화한 우륵은 이곳 충주에서 살기 시작했다. 우륵은 그를 보호하던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야금을 타면서 살았는데 그래서 탄금대라는 명칭도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는 데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충주 탄금대산책로를 걸어가보기로 한다. 탄금대에는 1953년에 세운 탄금대비를 비롯하여 1977년에 세운 악성 우륵선생추모비, 1978년에 세운 신립장군전적비등도 자리하고 있다. 충주 탄금대는 아름다운 길이며 공간이기도 하다.
해가 저너머로 떠난 시간에 탄금대 산책로에서 푸르고 맑은 향기를 내뿜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마치 서로의 영혼 속에 깊이 잠들어 매일매일 서로를 일깨워주는 사랑처럼 말이다.
악성 우륵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다는 의미의 탄금대보다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 신립(申砬)이 적은 병력으로 출전하여 이곳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대결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한 곳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탄금대 공원은 충주댐이 준공되어 호반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또한 탄금대 부근에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을 비롯하여 충주 고구려비(국보, 1981년 지정) 등 귀중한 문화유산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오래전에 이곳에서는 지표를 조사했었는데 조사단에 따르면 현지에서는 이번 지표조사 결과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류 50여 점과 석기류 9점이 출토된 데다 주변에서 신석기 및 구석기시대의 유적지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申砬장군이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쳤던 점 등으로 미뤄 이 곳은 원래 섬이었던 것으로도 추정하고 있다.
종전에도 삼국시대의 토기편들이 대량 출토돼 탄금대가 역사시대로 접어들면서 충주(忠州) 지방의 중심지로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충장공 신립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을 지나서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탄금대기가 자리하고 있다.
충주시는 지난 5월 탄금대 맨발 걷기 산책로 1.7㎞ 구간을 조성해 두었다. 맨발 걷기 산책로에는 세족장 2곳과 에어건 등을 설치해 이용자의 편의도 챙겼다고 한다. 충주시는 호암지, 만리산, 금릉소공원, 대가미공원 등 2025년까지 맨발 걷기 산책로 17곳을 추가로 조성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같은 풍경이었지만 10여분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게 된다. 모든 변화는 원하지 않아도 일어나게 된다. 탄금대 앞에 채워진 호수에서 머물러보니 우륵의 가야금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가야금과 관련된 사자성어로 소우탄금(對牛彈琴)이 있는데 소에게 거문고 소리를 들려주어도 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풀만 뜯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참된 도리를 말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보여지고 들으려고 해야 들을 수가 있다.
올해의 첫눈은 언제 내리게 될까. 물들어가는 탄금대 앞의 풍경 속에 백석시가 생각난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시며 보내고 싶었던 백석의 마음이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언제 다시 충주의 탄금대를 방문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가야금과 함께해 보면 어떨까란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