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음식, 남도종가, 수백 년의 핏줄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행
나주 하면 음식이 연상되는 도시로 가보면 물자와 여유가 넘쳤던 곳이라는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나주를 기반으로 하는 성으로 나주 임 씨가 있다. 전남 나주 나주임 씨의 원조는 고려 충렬왕 때 일본 정벌에 나섰던 여몽연합군의 리더 중 한 명인 임비 장군이다. 임비의 9 세손 임탁은 고려말 위화도 회군 세력들의 회유를 거부하고는 불사이군의 의기로 개성 만수산 아래 두문동으로 은거했다고 한다.
나주까지 내려온 김에 나주임 씨 대종가를 방문해 보기 위해 안쪽으로 걸어서 들어갔다. 현재 나주임 씨는 전라남도 나주·완도·장성 등 호남지방에 주로 거주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달성과 충남 서천군 일대에도 거주하고 있다.
나주임 씨 대종가는 골목길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대종가는 안채, 사랑채, 사당, 대문채, 부조묘 등이 있으며, 1900년대 초엽에 화재로 소실된 부분에 대해서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주임시 대종가는 나주에서 유일하게 창건이래 터를 보존해오고 있으며, 종가댁으로 부조묘를 두는 동시에 살림집의 기능을 적절히 유지하기 위하여 배향공간과 주거공간을 분리하고 있어서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살림집에는 거주하는 부부가 있었다.
이곳 회진은 마한, 백제 시절의 유적을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라고 한다. 신라 경덕왕 때 회진현의 이름을 얻었으며 고래시기까지 나주에 속한 고을로 있었다.
나주 임씨는 회진 임 씨로 불리기도 했었는데 이곳 나주임 씨 대종가는 사대부 가옥의 일반 형태로 신걸산을 뒤에 두고 영산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지형인 누저동에 자리 잡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갈마음수(목마른 말이 물을 마심)의 형국으로 난훈계복의 명당이라고 한다. 무려 6백 년이 넘는 동안 23대가 이곳에서 살았으며 이 터에서 종통을 유지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공간은 조금은 독특하다. 여러 집들이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분위기가 묘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나주임 씨 가문에서 나온 임붕의 아들들 중에서, 임복은 왜적에 대비해 철갑선(거북선)을 만들자는 내용을 포함한 ‘변사의 10조’를 올렸다고 한다.
나주임 씨 대종가의 가훈은 ‘심지는 청백하게 하며, 처신은 삼가 겸손하라’는 ‘청고근졸’ 가훈에 따라 630년을 이어왔다고 한다.
시간은 흘러가서 조금씩 현대화되고 바뀌었지만 그 시간의 힘은 그대로 남아 있는 대종가의 저력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나주라는 지역에 정착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 흔적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주 임 씨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가문으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대종가라는 의미는 대를 이어 가문의 유산이 내려온 곳이라는 의미다. 점차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요즘은 가문이라는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다. 가문이라는 것은 가족등의 일가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나주임 씨 대종가에서 오래전에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공동체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이곳이 나주를 뿌리로 한 성씨들의 활동이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 온 과정을 잘 보여주는 향토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2013년으로 나주 유일의 대종가로 23대째 터를 보존해 오고 있는 나주임 씨 대종가가 포함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