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하게 닮아 있는 한국의 계엄령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상황
19세기 유럽의 판도를 바꾸고 많은 영향을 미친 전쟁으로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있다. 프랑스는 이 전쟁의 패배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국민들은 굶주려야 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에너지를 응축하면서 극도로 불안정한 평화를 40년간 유지하게 된다. 전쟁의 시작은 프랑스의 리더인 나폴레옹 3세의 야심과 우매한 판단 때문이었다. 하나의 기업에서도 기업대표의 잘못된 판단은 기업을 소멸하게 하지만 국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
한 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데에도 신중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신중한 것은 국가를 이끌어갈 사람이다. 어떤 왜곡된 신념이나 인기영합주의 혹은 누군가 선동한 말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측면에서 실리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말로만 정의나 평화 따위를 떠들어댈 사람이 아니라 본질적인 가치와 삶을 나아지게 할 사람을 뽑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자신 주변의 참모의 말에 따라 전쟁을 감행했으며 윤석열 역시 어쨌든 간에 그런 참모들이 침묵을 했던 동조를 했다.
나폴레옹 3세의 그릇된 결정으로 프랑스는 4주 만에 프로이센에게 완전하게 몰리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계획하고 지휘한 독일군의 효과적인 공세는 프랑스의 비효율적인 병력동원과 좋은 대조를 이루면서 연달아 패배했다. 프랑스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 폐위와 제3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새로운 국민방위군 정부가 세워졌지만 파리는 독일군에 의해 봉쇄가 되었다. 참고로 프로이센에 의해 통일 독일의 발판을 만들 수가 있었다.
봉쇄된 파리의 시민들은 극빈한 생활을 하며 굶주림과 질병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죽기 시작했다. 9월 19일부터 시작된 봉쇄는 다음 해인 1월 28일에 항복하기 전까지 유지되었는데 그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임시정부 수반이던 레옹 강베타는 포위된 파리에서 기구를 타고 탈출에 성공하였는데 이때 기구를 만들어서 파리에서 떠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나마 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기구를 타기 위해서 많은 돈을 받고 돈을 벌었던 사람들은 기구쟁이들이었다.
이념이나 여러 시대적 상황을 제외하고 본다면 봉쇄된 파리나 봉쇄된 한남동 관저와 비슷해 보인다. 봉쇄된 파리에서 그 비극적인 상황을 이용해 돈을 번 것이 기구쟁이와 그나마 있던 식료품을 독식했던 업자들이라면 한남동 관저에서 돈을 버는 것은 악랄한 유튜버들이다. 유튜버들은 윤석열이 당선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거짓된 선동과 온갖 위기를 거론하면서 후원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에게 정의라던가 평화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위기를 만들고 돈만을 버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 당시의 프랑스와 한국의 현실은 잘못된 결정 하나로 인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피해를 본다는 사실이다. 프랑스는 전쟁에 패배를 하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배상금이 완납될 때까지 독일군의 점령경비까지 부담해야 했으며 이 모든 것은 국민에게 부여가 됐다. 한국에서도 이 상황이 끝나면 모든 국민이 그 결과를 어떤 형태로든 감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든 큰 역할의 상당 부분은 악랄한 유투버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