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의 화를 피하기 위해 왔다가 정착한 나주시의 집성촌
신라, 고려, 조선시대와 같은 고대봉건국가에서는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는다는 것은 오늘날처럼 정치계에서 물러나가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사화에 휩싸이게 되면 자신을 비롯하여 가문이 모두 풍비박산이 나서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적지가 않았다. 조선 중종 때 획기적인 변화를 추구하던 조광조가 정치적으로 몰린 사건이 기묘사화다. 이때 그와 같이 사마시에 급제했던 풍산홍 씨 홍한의 는 그와 함께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해서 나주에 정착하게 된다.
나주에 자리했던 집성촌의 명맥이 끊어진 곳도 여러 곳이 있는데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는 곳이 바로 도래마을이라는 곳이다. 식산이 마을의 주산이 되고 서쪽에는 박령산이 있어 마을 앞뒤로 용호가 기세를 펴는 형국이라고 한다.
나주의 도래마을의 지명은 식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내 천자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도천-도내 - 도래로 변천했다고 전해져 있다. 지금은 도래마을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 봄기운이 올라오지 않는 느낌이다. 4월에도 마치 겨울처럼 기온이 좀처럼 올라가고 있지가 않다. 앞서 풍산홍 씨 홍한의 가 이 마을에 은거하다가 최윤형의 딸과 혼인하여 터를 잡고 살면서부터 풍산홍 씨 동족마을이 되었다.
도래마을은 풍산 홍 씨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으로 지난 2006년 도래전통한옥마을로 지정돼 3채의 국가지정문화재 한옥과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시민들의 기부와 후원금으로 매입해 복원한 ‘도래마을 옛집’이 있는 전통한옥마을이다.
마을입구에서부터 영호정, 양벽정, 계은정 등 조선시대의 정자가 그대로 보전돼 있고 나주 계은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151호), 우남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165호) 등이 남아 있는 전통 한옥마을이다.
도래마을의 중심에는 계은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계은고택은 안채 상량문에 임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종 29년(1892)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물은 서쪽으로 향한 직선 축에 맞추어 깊숙한 안쪽에 안채, 가운데에 'ㄱ' 자 형태의 사랑채, 앞쪽에 솟을대문을 갖춘 행랑채로 구성이 되어 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아침 일찍 방문해서 그런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이곳에 자리한 옛집들은 19세기 후반의 한옥 특징이 잘 반영집들이 있다. 한오의 의미와 기능을 새롭게 소개하면서 근대 한옥인 안채와 함께 시간 흐름에 따른 한옥 변화를 만나볼 수가 있다.
도래마을에서 1박 2일로 머무르면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좋을 듯하다. 나주시에는 역사와 문화 자산은 다양하다. 아파트가 대부분의 주거공간인 현대인들에게는 삶의 여유를 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 곳곳에 자리한 집들은 개성 있는 정원들을 갖추어두고 있어서 그 정원을 살펴보는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나주 도래마을은 부자마을이었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 홍한의 가 도래마을에 터를 잡은 이후 약 500년 동안 의병장, 학자, 명사들을 길러낸 명문가로 이 부근을 지나갈 때 풍산홍 씨 땅을 밟지 않고는 못 지나간다고 했던 곳이다. 도래마을의 뒤편에 자리한 식산은 밥 식자를 쓰듯이 조선 군사사 사흘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는 산이었다고 한다. 적어도 이 마을에 가면 밥걱정은 안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