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서 있는 그 자리, 정말 당신의 능력 때문인가?
유튜브나 블로그등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결혼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람에게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질까. 인생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것은 많지가 않다. 각종 시험이 공정하다는 착각을 기반으로 도전하게 하지만 그것조차도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정확하게 공정한 것을 말하자면 공기가 하나도 안 들어간 진공상태에서 무결하게 실험을 거쳐서 나오는 결과물처럼 사람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는 환경부터 자라난 환경 등 모든 것이 제각각인 상황에서 공정할 수 있다는 착각은 우리 모두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처럼 허황된 말이다. 어느 정도 노력을 하면 가능한 것과 가능할 것 같지만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과는 다르다.
사회는 국가를 유지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왔다. 그 제도와 시스템은 전 국민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능력주의를 표방하며 마치 기회는 누군가에게 열려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 한국의 교육제도를 통해 배출된 학벌이 좋은 사람들은 과연 사회를 좋게 만들고 있을까. 그냥 능력주의에 기반해서 마치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는 것처럼 만들 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부여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만 잘살게 만드는데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흔히 말하는 능력자는 진짜 능력자일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를 잘한 것은 잘한 게 아니다. 원래 그 정도 해야 기본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제약받고 시간 없고 할 수 있는 것조차 많지 않은 사람이 능력을 가질 때 그런 사람이 능력자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은 미국의 사례를 들어서 기술하고 있지만 한국의 현실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사회구성원들이 어떤 출발점에 서 있든 노력과 재능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지 위로 올라갈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능력주의는 인정받을 수가 있을까. 물론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나 쉽다. 당신이 노력을 덜했기에 능력을 가질 수가 없다고 말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세상에 옳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려면 정말 오랜 시간이 있어야 한다. 언젠가는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로 갈지도 모른다. 그건 충분한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기다릴 만큼 인간은 오래 살진 못한다. 만약 조선말이나 일제강점기 혹은 한국전쟁 이후의 세대들이 오늘날의 삶을 본다면 유토피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유토피아라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도덕은 진보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진보는 아주 더디다. 우리는 지금 능력주의의 함정에 갇혀 살고 있다.
성공이라는 기준을 우리는 과언 제대로 세우고 있는지 묻고 싶다. 사실 지출에 대한 관점만 잘 관리된다면 한국인들이 평균적으로 성공이라는 기준은 너무 무리하기만 하다. 고생은 나쁜 것이고 워라밸처럼 일은 나쁜 것 쉬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이분적으로 생각한다면 영원히 만족은 없다. 고생이라는 개념을 다르게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택시와 버스를 탈 수 있는 시간에 버스를 타는 것이 왜 고생일까. 굳이 택시를 타고 빨리 가더라도 할 일이 없는데도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지가 않다. 왜 일은 좋지 않은 것인가. 쉬는 것이 과연 행복일까. 쉴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성공일까. 정말 자신의 목표가 최대한 쉬는 시간을 확보하고 비싼 것을 먹고 비싼 것을 타는 것만이 목표일까.
공정하다는 착각 속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논하고 있다. 대학 입시, 능력주의 사회적 상승, 학력주의, 성공, 대학, 일의 존엄성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왜 사회가 만들어놓은 균일한 잣대에 맞춰서 살아야 할까. 사람은 원래 다양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앞에서 말하는 성공에 대한 꼬드김과 불안을 먹고 살아가는 기업들이 많다. 당신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며 투자의 꼬드김이 있고 당신도 잘못될 수 있다라고 말하며 보험을 판다. 당신의 성공과 실패는 사회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정해지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불확정성의 원리만큼 삶은 불확실하지만 언제나 바뀔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