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이념대립이 만들어낸 희생 속에 자리한 평창 이승복기념관
세상을 살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고 있어야 하고 모르는 것이 좋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그걸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으며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들은 산업혁명이 늦게 일어났지만 어느 정도 서구열강을 따라갈 수 있었다.
적어도 20세기에 한국의 초등학교(옛 국민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책에서 꼭 접했던 사람 중에 이승복이라는 어린이가 있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이승복 할아버지쯤 되겠지만 보통은 삶의 마지막을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이승복 어린이라고 보통 부른다.
강원도에서 복무하고 만기 제대한 후 2일쯤 후에 강원도 잠수함 침투사건이 있었다. 2일을 늦게 제대했자면 아마도 한 달은 복무기간이 늘었을 것이다. 지금도 분단상태이며 전쟁이 종결되지 않은 휴전상태인 대한민국은 이념대립의 산물이 한국사회에 남아 있다.
야외공간에는 1998년 폐교된 이승복 소년의 모교인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가 있으며 학교 안에는 이승복 소년을 추모하는 작품과 관련 영상 등을 검색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이곳은 강원도 평창군 용편면이다.
1959년 12월 9일 계방산 기슭의 목골재 아래에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승복은 1968년 11월 2일 삼척 울진지방에 침투한 무장공비에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며 항거하다 온 가족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승복의 가족뿐만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비극적인 일들도 많았을 것이다.
본관 전시실을 비롯한 총 6개의 전시실에는 이승복의 생애를 기록한 유화 13점을 비롯하여 북한 공산군 장비 106점, 유품 33점이 주제별로 전시되어 있다. 이승복기념관에서 5㎞떨어진 곳에는 이승복 일가족의 실제 생가터가 남아있다.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잉여자본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물론 봉건주의 사회에서 계급은 명확하기는 했지만 중산계급의 시민인 부르주아라던지 임금 노동자인 프로레타리아가 등장하지는 않았다. 대사수의 사람을 의미하는 대중은 사실 자신의 터전을 잃어버린 대다수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던 와중에 그런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 공산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인간들은 항상 다른 관점을 가진 이들과의 차이를 만들려고 한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자리 잡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리전이기도 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공산화가 진행되던 유럽을 구하기 위해 마셜은 1947년 유럽의 자립계획에 미국이 재정지원을 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고 4년간의 경제원조로 유럽의 산업을 회복시키고 재정을 안정시켰으며 무역 신장을 도왔다. 그렇지만 한국은 미국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오래된 교육제도는 이제 바뀔 때가 되었다. 변해가는 미래에 지금과 같은 교육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보는 교육전문가들이 적지가 않다. 이곳에는 농업, 산업화의 중간지점에 있는 다양한 물건들을 볼 수가 있다.
1950년에서 1970년까지 한국은 급격한 변화를 겪어왔다. 모든 교육정책은 산업화의 일꾼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스템을 빠르게 정착시켰다. 그 와중에도 이념대립으로 인해 적지 않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는데 이승복을 비롯한 그 가족들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다.
한국은 오랜 시간 미군의 무기를 가져다가 약간 개량하는 형태로 국산화를 해오다가 이제는 차세대 전투기를 비롯하여 자주포등을 해외에 수출하는 수준에 올라섰다. 일명 K-방산도 하나의 수출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미래에도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힘의 균형이 깨진다던가 의도하지 않은 국지적인 충돌로 인해 비극적인 상황은 만들어질 수가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에 자리한 이승복기념관은 우리가 왜 균형적인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