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립박물관에서 만나는 시대를 넘어서는 사람들의 초상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화가들은 참 많다. 화가들은 사람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 시대가 원하는 사람의 모습을 표현했다. 서양화가는 주로 귀족, 사랑했던 사람, 왕족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재능을 남겼다. 유럽을 가보면 알겠지만 거대한 그림을 그려 건물에다가 남긴 화가들이 적지가 않다. 한국 역시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이 남아 있지만 서양화보다는 얼굴 부분이 과도하게 부각된 것이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한여름 정읍시립박물관에서는 지역을 대표하는 서화가인 석지 채용신의 그림 세계를 조명하는 테마전을 개최하고 있었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격변의 시기를 살며, 붓과 먹으로 역사의 숨결을 그려냈다.
이번에 만나보는 작품들은 대부분 초상이지만 채용신은 정읍을 비롯한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인물과 산수화 등의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청양의 인물이기도 한 면암 최익현의 모습이 보인다. 서화실에서는 채용신이 그린 면암 최익현 초상을 중심으로 최치원, 김기술, 김직술 등의 인물 초상과 칠광도, 송정십현도, 청양 최익현 압송도 등의 작품을 함께 볼 수가 있다.
사람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던가 어떤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화가들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화가들은 디테일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디테일을 보지 못하면 표현할 수도 없다.
이번 전시전에서는 구한 말의 시대적 상황을 볼 수 있다. 그림을 그리고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대중들이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직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신학적 지식을 독점하던 가톨릭이 무너진 배경 역시 인쇄술이 꼽히고 있다. 우리의 금속활자는 문화재의 관점에서 위대했을지언정, 경제적 혁신을 부르지 못한 것은 발명은 있었으나 상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초상은 경주 최 씨의 시조인 최치원을 그린 초상이다. 무성서원에 있던 1831년에 그려진 초상을 1924년에 이모 한 것으로 치건을 쓰고 의자에 앉은 전신 좌상이다. 채용신은 최치원의 초상을 그리면서 안면에 무수한 붓질을 통해 피부의 질감과 입체감을 살리려고 했었다.
채용신은 특히 눈동자를 그리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수정체를 진한 먹선으로 그리고, 동공은 검은색으로 칠했으며, 홍채는 엷은 먹으로 6개가량의 점을 돌아가며 찍어 표현하였다. 그리고 흰자와의 경계선 밖으로 흰색 또는 하늘색 선을 쌀짝 둘러 눈동자를 좀 더 명료하고 영롱하게 보이게 표현하였다.
서양화의 경우 주로 그린 화가의 이름이 더 부각되지만 조선시대의 초상에는 그려진 주인공의 이름이 적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채용신은 자신의 이름을 적어서 자신이 그린 그림임을 알렸던 사람이기도 하다.
채색을 하지 않고 연필로만 어떤 사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참 매력적인 일이다. 사진이나 본래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리는 사람이 가진 내면의 눈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