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가 직접 한글로 쓰인 편지를 보관하고 있는 김해 선조어서각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런 전쟁 중에 하나가 임진왜란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포로가 생기고 포로는 하나의 재산처럼 생각되어 본국으로 끌어가기도 했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선조는 한글로 쓰인 편지를 보냈다. 임금에게서 받은 문서를 소중하게 보관하는 집이 바로 어서각이다.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로 123-18에 '선조어서각(宣祖御書閣)'이 있다. 선조어서각은 1836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1989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지어졌다. 다른 어서각들에 봉안되어 있는 임금의 문서는 신하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이곳 선조어서각의 친필은 나라 안 모든 백성들에게 선조가 직접 한글로 써서 배포한 국난 타개용 대국민 시국 편지였다.
선조어서각이 자리한 곳에는 아이뜰공원이라고 해서 작은 공원이 조성이 되어 있다. 선조국문유서는 안동권 씨 판결공파 소유물이지만, 현재는 이곳 선조어서각이 아니라 김해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어서각은 복사본이다.
선조국문유서는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당시 피란하여 의주에 머물고 있던 '선조가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로 쓴 교서'이다. 선조는 일반대중이 쉽게 알 수 있는 한글로 쓴 교서를 내려 포로가 된 백성을 회유하여 돌아오게 하려는 목적에서 친필 한글 편지를 써서 1593년 9월 전국에 배포했다.
일제강점기에도 그러했듯이 전쟁이 길어지게 되면 일반 백성들은 포기하기도 한다. 그냥 이렇게 점령한 대로 살아가고 적응하다 보면 나라가 없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을 보통 부역자라고 부르는데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백성들은 약간의 식량에 복종하고 있다는 장계를 올렸다고 한다.
어떤 백성들은 그들에게 부역하는 것을 넘어서 조선군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김성일은 배반한 백성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고성현령을 죽이려고 한 사건까지 보고했다. 권탁(權卓, 1544∼1593)은 선조국문유서를 품고 '적진에 몰래 들어가 적 수십 명을 죽이고 우리 백성 100여 명을 구해 나왔다.
선조국문유서에는 어쩔 수 없이 왜인에게 붙들려 간 백성은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과,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사람, 또는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을 많이 데리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천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릴 것을 약속한 내용들이 실려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소신과 상관없이 이득이 되는 대로만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모두를 위한 것보다는 자신과 가족의 이득 앞에서 매관매직도 서슴지 않기도 한다.
당시 권탁이라는 사람은 경북 선산(구미지역)에 살고 있었던 사람으로 김해 지역을 지키는 임무를 자청해서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김해지역등은 모두 왜군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었다.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왜군의 진지로 들어간 권탁은 조선인 포로들과 내통해서 왜군을 유인해서 섬멸했지만 본인은 심각한 중상을 입고 같은 해인 11월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선조어서각 일원의 입구에 홍살문이 서 있다. 홍살문 오른쪽에는 재실 경충재(景忠齋)가 있다. 홍살문과 재실 중간에는 '증 통정대부 장예원 판결사 권공 묘비(廟碑, 사당의 비석)'라는 빗돌이 세워져 있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다는 것은 위기에 처하거나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보면 된다. 1593년에 작성되었던 문서는 부산박물관에 기탁했다가 2021년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이 널리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 작성한 최초 공문서인 ‘선조국문유서(보물 제951호)’가 김해시민 품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