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과 명주 명소로 자리한 상주의 함창에 자리한 함창향교
지금은 상주시에서도 한적한 느낌이 드는 지역이지만 함창은 신라시대부터 양잠과 명주로 유명한 지역이었으며, 전국 최대 규모로 명주를 사고팔던 시장인 '명주전'이 열리던 곳이었다. 석유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섬유원료가 있기 전까지 명주는 상당히 비싼 옷감이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정부차원에서 명주 길쌈을 권장하여 각 지방에 잠실(蠶室)을 설치하고, 종상법(種桑法)을 반포했으며 관복을 국내산 명주로 바꾸어 짓게 했다.
그 명주로 유명한 상주시 함창에 자리한 함창향교를 방문해 보았다. 함창향교는 함창읍지에 구향교동에 있던 객관(客館)에서 남국난 이후의 현지로 이건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970년 10월에 성균관대학교 교육연구원에서 전국 향교 실태 조사를 실시, 1398년(태조 7년)에 건립했고 1417년(태종 17년)에 지금 자리로 이건 했다고 보고되었다.
대부분의 가치가 있는 것들은 시간을 가지고 만들어진다. 교육도 그렇고 가치가 있는 물건들도 그렇다. 생각도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꾸미고, 텅 비어 있으면서 가득 찬 것처럼 꾸미고, 곤궁하게 살고 있으면서 풍부한 것처럼 꾸민다. 그렇게 꾸미기만 하면 필히 자신을 잃게 된다.
내면을 충분히 채워볼 수 있는 시간은 가지려면 다른 사람과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함창향교의 가을은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오늘날의 향교를 있게 만든 공자는 의(意), 필(必), 고(固), 아(我) 네 가지의 일을 거절하였다. '의'란 사전에 이러쿵저러쿵 하자는 의도이다. '필'이란 반드시 이렇게 하고 싶다는 고집이다. '라고'란 단단하게 굳어버린 생각을 바꾸지 않는 완고함과 고루함이다.'아'란 '내가 내가'라는 자기 중심주의이다.
함창향교는 정문인 외삼문을 지나면 안마당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뒤쪽 높은 곳에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을 두었다.
함창향교가 자리한 함창은 지금도 전통 명주를 생산하고 있으며, 여기서 짠 명주로 의복과 소품, 각종 장신구 등을 생산하며 우리나라 전통 명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상주시 함창읍 교촌리의 마을 이름 교촌(校村)은 함창향교가 있는 마을, 향교마을이라는 의미다. 이 향교마을에 몇 년 전부터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데 향교 인근에 들어선 명주테마파크와 한복진흥원·잠사곤충사업소 등 때문이다.
가까이 두기에 좋은 사람으로 누구가 있을까. 솔직한 친구, 도리를 아는 친구, 박식한 친구는 유익하다. 달콤한 말을 걸어오는 친구, 착한 사람이지만 겁이 많은 친구, 수다스러운 친구는 유해하다고 공자는 말을 했었다.
함창향교의 명륜당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했을까. 시간이 지나 그냥 문화재로서 자리하고 있지만 2천 수백 년 전에 공자가 뱉은 말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었다.
배움에 익숙한 사람은 깨달음을 얻는 대로 행동도 바뀌기 마련이기에, 늘 자신을 새롭게 고치면서 살아간다. 자신의 이익으로 말을 그냥 쉽게 하지 않고 상주시 함창의 잘 알려진 명주처럼 가치 있는 실을 만들기 위한 길을 걷기에 함창향교는 그런 느낌을 전달해 주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