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의료서비스를 이야기했던 양성지를 모신 금산 귀암사
조선시대 왕 27명의 평균 수명은 46.1세였다. 가장 장수한 조선시대 왕은 영조(82세), 태조(72세)였다. 그다음으로 고종(66세), 광해군(66세), 정종(62세)이 뒤를 이었다. 지금의 의료와는 다른 수준이지만 동양의학에 기반한 의료혜택도 있었으며 궁핍하지 않게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수명이었기에 일반 백성의 경우는 40세보다 훨씬 아래였던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물론 아기였을 때 사망했을 경우가 많기에 평균수명이 낮았던 것도 사실이다.
금산군의 부리면 평촌 1리에 가면 양성지 선생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이 마을에는 귀삼사, 귀암당, 귀암사숙, 귀암재, 양성지선생 묘비, 거북바위, 등이 적벽강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에 귀암사는 조선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40여 년간 집현전 학사, 이조판서, 공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체학, 사헌부 대사헌을 두루 거친 문양지 양성지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그는 현실적으로 세상을 보았던 인물로 백성을 위해 각 지방에 의료기관 설치를 주장하였다.
지금도 한의원에서 진료를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한의원을 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허준으로 대표되는 백성의술로 알려져 있지만 몸이 안 좋았을 때 민간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입구에는 양성지 선생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 고유의 풍습이 중요함을 강조하였으며 과거 시험을 현실에 맞게 바꾸길 요구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눌재 문화재를 매년 열고 있다. 그의 6대손인 양웅해는 선조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귀암사에 사숙을 열어 향토 교육에 이바지하였다고 한다.
귀암사 사숙은 원래 서당골에 있었으나 홍수가 일어나 1883년(고종 20)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고쳐 지었고, 1923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3년에는 양성지의 일생과 행장 및 공훈을 기록한 눌재양선생묘비를 세웠고, 1973년에는 비각을 세워두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해오던 행사들은 모두 생로병사에 달려 있었다. 이제는 그런 분위기도 바뀌어가고 있다고 한다. 태어나서 1년이 되기까지 살아남는 것이 어려웠기에 돌잔치를 했으며 60세까지 살면 환갑잔치를 열었던 태가 있었다.
건강하게 생존하기 위해서는 먹고살기 위한 농업 기반과 병에 대한 지식도 필요했다. 전국적인 의료체계의 부재와 낮은 보건의식은 조선시대 내내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짧게 유지할 수 박에 없었다.
양성지 선생은 사람들의 생로병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인간이 환경 속에서 어떤 태도로 삶을 이어가고 생존하게 되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금산(錦山)은 동남쪽으로는 백두대간이, 중심부로는 금남정맥의 지류인 성치지맥이 지나가고 있는 지형에 자리한 지자체다. 금산의 물줄기는 옥천으로 가는 서화천, 영동으로 가는 천내강, 서대전으로 흐르는 유등천, 논산으로 통하는 벌곡천, 완주로 빠지는 장산천이다. 금산의 인물이며 의료에 대한 중요성을 생각했던 양성지 선생에 대해 만나볼 수 있었던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