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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심장 Oct 31. 2024

달동네 모서리에 서서 섧게 울던 그 밤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돌아오는 날에는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거의 뭉개지듯 널브러집니다. 별 이야기를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정말 100m 달리기를 여러 차례 한 듯 힘이 하나도 남아있질 않아요. 그래도 집에 돌아와 잠든 아이들가슴에 얼굴을 묻을 때면, 아이들 품속에서 나오는 따스한 체취가 볼과 코 감싸 쥐듯, 천천히 저를 녹여줍니다.


그럴 땐,  저항할 수도 없이 거센 물살에 어지듯 맥없이 흔들거리던 두 발이 비로소 단단한 대지위로 안착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선생님께도 말씀드렸지만, 몇 년 전부터 저는 심각한 기억 소실을 겪고 있습니다. 사실 기억 소실도 문제겠지만, 더 심각한 건 시간 순서엉망이라는 것이겠죠. 그래서 제 기억 속의 저는 어느 날엔 스물셋으로, 어느 날엔 마흔 하나로 그렇게 튀어 오릅니다.


기억 하나가 온건하지 못하고 할퀴어져 긁혀버린 유리창마냥, 대부분이 흐릿한데 그 사이사이 조금 또렷하게 보이는 기억.


머릿속의 저는 추운 겨울밤 어두운 길을 홀로 어깨를 웅크린 채 걷다가 길 옆 따뜻하고 포근해 보이는 창문을 기웃대는 것처럼 이전 기억들을 떠올립니다.




아이들을 함께 키우던 사람과 헤어지게 되고 처음에는 아이들을 나눠서 양육할 계획이었지만, 제가 도저히 그게 안 되더군요. 아이들 하나라도 떨어뜨려놓았다간, 그리움에 하루를 못 견딜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그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기도 하고, 마시는 날엔 집에 귀가하지 않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아이가 방치될까 봐 그 두려움에 견딜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고양이 다섯을 데리고 갈 수 있는 집은 서울 안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뒤적거려도 투 룸 이상을 구하기엔 쉽지 않은 금액에 밤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서성댔죠.


제가 살았던 집은 큰 언덕 맨 위에 있던 곳이었는데, 막 달동네는 아니고 주택가였습니다. 그래도 눈이 많이 오는 날엔 마을버스가 올라가지 못할 정도의 경사가 진 곳이어서, 한참을 헐떡거리면서 걸어 올라오다가 뒤를 돌아보면 아래로 집들이 보이는 구조였습니다. 그날도 근무가 끝나고 한참을 헉헉대며 걸어 올라오다가 문득 뒤를 봤는데, 수많은 불빛이 반짝거리는데 사이에서 하나, 우리 애들 데리고 뉘일 작은 하나 없다는 것이 못내 서러웠는지 눈물이 돌더니 어느새 섧게 울고 있는 스스로를, 지금의 제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기억 속 그날의 저는 그렇더군요.


도와주세요,라고 말할 대상도 없었습니다. 사람 아이가 아니라 고양이들이잖아요. 고양이들을 키울 집을 찾기 위해 도움을 줄 사람 같은 건 도저히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부모님과 같이 산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제 아이들의 손을 놓을 수 없었어요.


늘 열심히 살았는데, 뛰듯 날듯 정말 열심히도 살았는데 어째서 내 아이들 하나 지킬 공간 하나 마련하기가 이토록 나는 힘이 든 걸까... 물론 그 뒤에도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수도 없이 겪으면서 더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는데도 유독 그날 밤의 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울 지경이긴 하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는, 선생님,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요즘, 다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면 자신 없어...라는 말을 내뱉게 됩니다. 제가 너무 나약한 걸까요? 도저히 어떻게, 얼마나 더 힘을 내어 '살아남아야 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힘내서 살아봐야죠!라고만 말씀하시려나요.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저는 정말 계속 살아남는 게 너무도 자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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