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때와 다름없는 주말일 거라 예상했는데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전화로 인해 일정이 바뀌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 생일이니 주말에 같이 점심을 먹는 건 어떻겠냐고요.
어? 내 생일?
어찌 된 영문인지, 저는 매년 생일을 타인에 의해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메일 속 생일 쿠폰으로 인해, 문자로 인해 그리고 부모님으로 인해. 자기 생일을 캘린더에 걸어두는 사람이 있긴 할까요? 없을 듯싶긴 한데.. 뭐 여하튼 저는 매년 제 생일을 잊고 넘어가게 되는 것도 같아요, 선생님.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도 따로 친구들과 모여 생일 파티를 한다거나 한 기억은 없습니다. 유치원 때 기억...? 심지어 가장 최근 남자친구가 있었을 때도 그냥 어영부영 넘어갔지 싶습니다. 생일 케이크? 이런 건 언제 봤었는지도 기억에 없긴 합니다. 물론 제가 기억을 많이 잃어버리긴 했습니다만, 정말 그건 사실인걸요. 선생님께는 생일이 특별한 의미인가요? 제게는 딱히 그런 게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부모님께서 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주셨습니다. 뭐 흔히 부모들이 이야기하는, 너는 그래서 어쩔 거니, 앞으로 어떻게 살 생각이니.. 취조인 듯 걱정인 듯하는 그런 이야기들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경험에 대해 아버지의 생각을 나누고 저의 의견을 묻고 경청해 주시는, 정말 이런 제가 생각해도 보기 드물게 이상적인 부모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가장 이상적인 부모라고 해야 할까요. 그 어떤 압박도 없이 격려와 사랑, 그리고 저희 가족의 전통과 같은 일정한 금액의 용돈을 주시고는 집에 들어와서 미주알고주알 밤 내라, 대추 내라 하는 법도 없이 후다닥 가셨습니다.
그 사이에서 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척했습니다. 요즘 어때? 괜찮아요, 잘 지내요, 애들도 건강하고.
넌지시 선생님과의 상담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에이, 별 거 아닙니다.라는 톤으로 이야기했죠. 이제껏 늘 그래왔는걸요.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그 배로 다시 돌아오는 걱정과 불안.. 의 되돌아오는 파도를 지금의 저는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넘어지거나 부서질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지금의 저는 일단 살아있어야 하므로... 저는 햇살 좋은 가을 하늘 아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걱정이나 우려는 아주 노멀한 상태 정도라는 듯 싱긋 웃었습니다.
부모님과 매번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끼는 감정이지만 혹시라도 제가 떠난 순간에 부모님께서 가지게 될, 후회와 자책이 두렵긴 합니다. 그래서 사실 선생님, 아이들 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모두 떠나신 다음에야 저도 삶을 마무리하려는 계획을 생각해 본 적도 있지만 도저히 지금으로서는 제가 그때까지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더 큽니다... 저는 너무 나약한 걸까요.
도대체 왜, 대체 왜라고 만약 부모님께서 제게 물으시면 너무도 오래된 이야기라고, 이미 30년도 전부터 나는 그만 삶을 멈추고 싶었노라고... 말하면 이해는 될까요. 사실 저조차도 어디서부터 왜 시작된 건지 이해하지 못했는걸요. 그저 지금은 견디는 시간들이니까요.
저희 집에는 몇 가지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데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라는 그림도 있습니다. 그 그림을 처음 걸었을 땐 전 남친도, 어머니도 질색해하셨지만 저는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천천히 적셔져 가라앉는 느낌이 듭니다.
제 생일을 다음 해에는, 또 그 다음 해에는 누가 기억할까요? 기억되지 못한다 해서 아쉽거나 서운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제가 이상한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