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하네요, 선생님. 고단합니다. 별 것을 하지 않는 요즘에 잠이 부쩍 늘었는데도 여전히 저는 참 피곤합니다. 왜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겨울이라서 그럴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떡이 되어서 다시 잠들었네요. 어쩌면 막내는 저리 잘 까요? 참... 희한도 한 아이입니다. 순간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지만, 이라는 말을 덧붙일 뻔했는데 어쩌면 제 마음엔 그리 느껴지기도 하나 봅니다.
지난 상담 때 선생님은 그래도 살아서 해보고 싶은 게 있지 않냐 하셨는데 글쎄요... 저는 충분히 아주 늙게 오래도록 산 기분입니다. 아직 다 말씀드리진 않았지만 첫사랑이 죽은 여파였던 건지, 이후 스며들었던 동성애 세계 그리고 곁다리에 슬쩍 스치기만 했던 조폭 세계, 그리고 요 최근까지 저의 한 축을 차지했던 BDSM 세계까지... 참 여러 세계를 걸쳐 살아왔다고 생각해서인가, 저는 어쩐지 몇 배의 압축된 시간을 살아온 것도 같아 그래도 살아야 뭐 더 좋은 걸 만나지, 더 좋은 일들이 생기지라는 그 위로 같은 말에 어휴..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아, 눈이 조금 커지셨군요. 저 이야기들은 언젠가 선생님과 상담이 계속된다면 말씀드릴게요. 뭐... 이래저래 일이 많았습니다. 왜 많았을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바란 적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죽기 전 해보고 싶은 것이 있지 않냐?라고 물으셨지요. 흠...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요... 그래도 한 가지 있다면 5년 정도 후에 딱 1년만, 바닷가에서 살아보는 것이 있긴 합니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제가 앞으로 5년 정도 뒤라고 막연히 잡은 건, 아이들이 다 떠난 후 뒷정리 겸 한 1년을 더해둔 기간이긴 합니다. 막내 나이가 선생님, 어느덧 열 넷입니다. 아무리 요즘 고양이 수명이 늘었다 해도 평균 열다섯이면 살았다- 합니다. 남은 둘째는 이제 한두 달 뒤면 대학 가기 직전이 되고요. 제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아이들도 아플 거면 아주 짧게 앓고 미련 두지 말고 호드득 가길 바랍니다. 마음에 미련이나 걱정이 남아 자꾸 아픈데도 꾹꾹 눌러 참으면서 엄마를 뒤돌아보기보단, 괜찮으니 툭툭 털고 아주 조금만 앓다가 떠나길 바랍니다. 그건 저에게도 해당되고요.
그렇게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나면 대부분의 살림살이는 정리하고 아주 간단하게 채비한 후에 바닷가에서 딱 1년만 살아보고 싶습니다.
저는 바다가 좋습니다. 그저 바다가 마냥 좋습니다. 이유도 없이 그 넘실대는 바다를 보고 듣고 향을 맡을 때만큼은 모든 것들이 하얗게 빛바랩니다. 한 때는 누군가와 함께 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결혼하고 싶다 말했던 전 남자 친구하고는 막연하게나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럴 수 없음을 뭐, 금세 깨달았지만요. 그는 그렇게 저와 살아가기엔 어리고 약했고 무엇보다도 아직 어머니 품에 있는 아이일 뿐인걸요. 애 다섯을 키워낸 마당에 또 다른 아이를 떠맡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서 초기에 잠시 품었던 마음은 금세 물에 풀어놓듯 흔적도 없이 풀어졌습니다.
뭐 이러나저러나 또한 그 사람은 이제 훌훌 날아 다른 사람에게 안착했으니 그녀와 안전한 세게에서 안전한 이 도시에 남아 넘들과 비슷허니 살아가겠지요. 애초에 그는 제가 품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점찍어둔 곳이 있긴 합니다만, 하도 지방 텃세가 심하다 하니... 무엇보다 혼자 왜 여기까지 무슨 볼 일로...?라는 말없이 눈으로만 하는 그 따가울 질문을 마주치기도 전에 질릴 것도 같아, 아마 완전한 로컬로는 들어가지 못할 것도 같고 읍내 언저리 어딘가에 살면서 걷든, 차를 끌고 가든 5분, 10분 이내에 사는 어딘가를 정하겠지요.
그리고는 매일 같이 바닷가에 나서 앉아 하염없이 바라볼 겁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흘러가는 바다와 하늘을, 세상을 그렇게 원 없이 바라보고만 싶습니다. 날이 따뜻하면 따뜻한 대로 바다로 뛰어들어보기도 하고 눈이 바람에 흩날려 가로로 내리는 날에 회색으로 물들 바다도, 굵다 못해 아프기까지 한 빗줄기가 하염없이 표면을 때려 어깨 들썩일 그 바다도 하염없이 보고만 싶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걱정도, 스스로에 대한 서글픔도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그저, 그저 그 바다에 딱 1년만 가까이 있어보고 싶습니다. 그게 제 마지막 소원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거면... 저는 선생님, 그거면 충분하지 싶습니다.
더는, 정말로 더는 바라지 않습니다. 더 원하는 행복도 없고요. 제게 남겨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이 살아가야 할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제가 남은 무게는 남은 아이들 셋인데, 아직은 정정한 늙은 내 새끼들 뿐이니 이 아이들만 잘 여며 채비해 손 흔들어 배웅하고 나면 정말로 딱 그랬으면,
이 것이 제게 남은 마지막 소원입니다. 더는, 더는 그 무엇도 바라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