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심 구호 물품을 문에 걸고 도망간 자를 찾아라.
응급실이 아니라 응급심(心)에 간다고?
아플 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조금이라도 아프면 금방 병원으로 가서 확인해 보는 사람인가요? 미루고 미루다 더 병을 키우는 편인가요?
상황에 따라 다르니 극단적으로 둘 중의 하나로 선택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마다 약간의 경향성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미루다 병을 키우는 쪽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편이기도 하고, 병원 가는 자체를 귀찮아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급한 경우는 다르겠지요. 느긋하게 치료를 받을지 말지를 결정할 시간이 없습니다. 응급 처치를 받아야 하니까요. 응급실까지 가는 길은 늑장 부려서는 절대 안 되겠지요.
‘응급’이라는 단어의 한자를 보시면 마음 심(心)이 각각 하나씩 들어가 있습니다. 무심코 한자를 찾아보고는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응할 응(應)은 매 응(䧹) 자와 마음 심(心)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예로부터 매를 훈련해서 짐승을 사냥하는 방법은 가장 오래된 사냥법이라고 합니다. 즉, 매가 나의 부탁에 응답해서 토끼를 잡아오는 것입니다. 매(䧹)가 내 마음(心)을 알아주어 응(應)해주는 것이지요.
또한 급할 급(急) 자는 말 그대로 급하다. 중요하다. 재촉하다는 뜻인데 刍자는 及(미칠 급) 자가 변형된 것으로 急자는 사람을 붙잡는 모습에(心) 자를 더해 떠나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초조한 마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네이버 어학사전) 역시 마음이(心) 들어가 있는 글자이지요.
응급이라는 단어에 마음 심(心)이 들어가 있는데 왜 우리는 몸이 아플 때만 응급실을 가고 정작 마음이 갑자기 너무 아플 때는 혼자 앓고만 있을까요?
힘든 고민이 있을 때 혼자 자책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괜히 화풀이를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얼마 전 브런치 공동 매거진 '보글보글'의 주제 '지킬 앤 하이드' 편을 고민하던 중 응급실에 가야 할 고비가 있었습니다. 제 안의 하이드를 자꾸 떠올렸던 탓이었던지 저의 그림자가 저를 잡아먹어 갑작스럽게 한 행동에 스스로 놀라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런 제 자신을 만나고 마음이 크게 아팠었습니다.
그때 저는 '마음의 응급실'이 있다면 가고 싶었습니다. 한밤중 일어난 감정의 동요였기 때문에 달려갈 응급실이 절실했습니다. 누군가 말이라도 들어주었으면 했습니다.
그리곤 상세한 사실의 기록이 아닌 제 마음의 정리를 위해 글을 썼습니다. 그동안 저는 매일 출근하듯 온라인 글방에서 주 5일 매일 한편씩 소소한 글을 쓰고 있었기에 글방 친구 한 명이라도 제 소리를 들어주기를 바랐었지요. 글을 쓰고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며 내 입장과 타인의 입장을 생각했습니다. 반복해서 읽으며 퇴고를 하다 보니 조금은 후련해지고 상황과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트,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응급실의 기능을 충분히 해냅니다. 어디서든 꺼내서 입원 수속할 수 있는 나만의 응급실입니다. 상황에 바로 반응하기보다 잠깐 멈춰서 글을 쓰는 동안 일단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내용이 무엇이든 글로 쏟아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치유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누군가 글을 읽고 나의 하소연을 들어준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아주 안전한 관계를 유지해온 다정한 글 친구들이 주변에 있다면요?
일기처럼 혼자 쓰는 글이 있고 독자가 있는 글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글은 독자를 생각해 써야 하지만 어느 날은 솔직하게 고통을 드러내고 있는 글도 있습니다. 그런 글에 반응하는 다정한 글 친구들은 마음을 위로하는 우정의 글 치료사들이 됩니다. 평소 안부를 주고받고 글에 대한 감상이나 좋은 점들을 이야기하며 가볍게 남겨지는 댓글이었지만 글 친구의 환부를 본 그 순간은 달라집니다. 댓글 하나가 마음을 치료하는 글 처방으로 남겨져있습니다. 그저 한 줄 댓글이라도 다른 기운을 담고 있습니다. 단어로 닿을 수 없는 깊은 마음으로 응원하는 한 줄입니다. 아예 댓글이 없이 묵묵히 지켜봐 주며 있어주는 '유령 댓글 치료'도 감동이 됩니다. 그런 글 친구들의 '응급 댓글 처치'는 저를 살렸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아무 댓글 없이 제 상처에 머물러있었던 한 다정한 글 친구는 다음날 오전 저희 집 대문에 꽃을 걸어두고 갔습니다. 부담 가지지 말라고 일부러 몇 송이만 두고 간다며 멀리서 힘들게 자전거를 타고 와놓고도 얼굴도 안 보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는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날 휘청이던 제 모습이 비쳐 보였던 연약한 줄기의 스카비오사 꽃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꽃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처진 어깨가 꽃의 아름다움에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밤이 되니 다시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식탁을 치우지도 못하고 무겁게 앉아있는데 또 다른 글 친구 둘이 집 근처를 지나는 길이라고 일부러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그들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낮에 꽃을 남겨두고 도망간 그녀를 찾느라 골목 멀리를 살펴보았지만 이미 멀리 가버리고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찾아온 글 친구들은 꼭 붙잡고 징징징 투정을 부리고 싶었습니다.
생각보다 엄살이 심한 마음병 환자 때문에 글 친구들의 응급 댓글 처치도 모자라 응급 눈물 처치가 이어졌습니다. 직업 때문에 감정을 오랫동안 통제해 왔던 오랜 습관 때문에 자주 막히던 관을 시원하게 뚫어버린 친구가 온 것이었습니다. 댓글 장인으로 불리며 공감 능력 일인자로 꼽히는 글 친구는 제 수도꼭지를 틀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콸콸콸~ 그런데 글 친구의 수도는 왜 또 같이 터지는지요. 같이 콸콸콸~
잠시 수도관 청소 후 고여있던 쇳물이 흘러나갔습니다. 충분히 흐르고 나니 새로 깨끗한 물, 정화수로 바뀌었습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고 친구가 떠날 때쯤 웃으면서 떨어지는 눈물은 크리스털 투명한 빛이었습니다.
응급실은 제 노트였고,
제 온라인 글방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친 마음을 응대해 주는 응급 댓글 치료사들은 멀리 서는 '응급 위로 댓글'을 남겨주고, 가까이에서는 '응급 구호 용품'인 꽃과 눈물과 공감으로 인공호흡을 해준 글 친구들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가족'이라는 회복실을 거친 후 외출해 브런치 약속 장소에 나와있습니다. 브런치에서 만나는 글 친구들은 응급실에서의 제 치료 수기를 나누는 사이이기도 합니다. 또한 응급실에서의 같지만 다른 상처와 눈물 그리고 회복의 지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퇴원한 환자 친구들이기도 합니다. 브런치를 함께 하는 글 친구들은 더 많은 마음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고 있어서 매번 놀라게 됩니다. 응급실이라는 주제로 나온 이야기를 읽다 보니 모두 몸의 아픔은 물론 마음의 큰 아픔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고 있음에 마음이 쓰였습니다. 마음을 돌보는 응급심(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언제든지 응급실에 갈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급하고 초조한 마음을 읽어주며 그 마음 옆에 머물러 줄 수 있는 글 친구가 있다면, 응급상황임을 글로 알리는 순간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쓰는 댓글 하나로 누군가를 살릴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글로 사람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글 치료사로서, 글 처방과 글 대안 요법을 전문으로 하는 글 응급심(心)과 선생님이 되어 보시는 것은 어떠세요? 사실 브런치에서 그런 분들의 댓글을 너무 많이 보아서 제게 주신 처방도 아닌데 응급 처치 댓글에 혹은 재활 댓글에 가슴이 따뜻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쯤이면 브런치 응급 치료사님들 한 분 한 분 자격증을 발급해 드리고 싶을 정도네요.
지금 마음으로 읽어주시는 응급심(心)과 선생님~
진료 끝나시면 심장 버튼 까만색인지 잘 확인하시고 계시지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6월 4주
보글보글 글놀이
주제: “응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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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다양한 글을 각각의 색으로 매일 한 편씩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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