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스기나미구 코스기유, 이나기시 카케노유
2026. 03. 09.
도쿄에서 친하게 지내는 동료 B는 처음 이곳에 와서 인사를 나눌 때 '온센을 너무 좋아해서, 일본의 온센을 많이 찾아다닐 거다.'라는 문장으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B는 도쿄 도내 온센과 센토를 도장깨기 하듯 다니고 있으며, 그녀는 소위 온센과 센토 마니아이자 전문가로 우리 사이에서 통한다. 온센(温泉, おんせん)은 우리말로도 한자를 그대로 읽어 사용하는 온천, 센토(銭湯, せんとう)는 직역할 수 있는 우리말은 없지만 우리나라의 목욕탕과 같다고 보면 된다.
그런 B의 추천으로 방문하게 된 고엔지의 코스기유(小杉湯). 언젠가는 가 봐야지 생각했었는데 정기권을 열심히 이용해야 하는 이번 달이 좋은 타이밍이 되어주었다. 날이 조금이라도 추울 때 몸을 담그고 녹이러 가야 한다.
코스기유에 가기 위해 고엔지(高円寺)를 처음 가 보게 되었다. 고엔지는 도쿄도 스기나미구에 위치한 도시로, 최근 들어 관광객들 사이에서 빈티지 쇼핑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늘어선 각양각색의 빈티지 가게들을 구경하며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눈에 들어온 300엔짜리 분홍색 니트를 사서 벚꽃 시즌에 입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찰 대로 꽉 차버린 기숙사의 서랍장을 떠올리며 이내 그만두었다. 들고 온 가방은 이미 수건과 갈아입을 옷, 얼굴에 바를 것 같은 것들로 꽉 차있기도 했고.
도쿄 내 모든 센토의 입장료는 550엔인데, 저렴한 입장료인 만큼 수건은 직접 들고 가야 한다(물론 돈을 내면 빌릴 수 있다). 그럼에도 샴푸나 바디워시 같은 기본적인 어메니티는 제공이 되기 때문에 한국의 목욕탕과 비교해도 입장료가 정말 저렴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 현지에서는 센토에 매일 가서 목욕을 하는 어른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우리 동네에 있는 센토에 몇 번 간 적이 있는데, 항상 같은 분들이 목욕을 하고 계셨고 그중에는 나에게 말을 걸어준 분도 있었다. 그 분과 대화를 나누며 지금까지 내가 봤던 같은 분들은 대부분 센토에 매일 오는 분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나 같은 공용 기숙사에 사는 것이 아니라면 일본의 집에는 대부분 욕조가 있는데, 그럼에도 센토에 매일 간다는 것은 식지 않는 뜨끈한 물에 몸과 마음을 녹이며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마음이려나. 실제로 센토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면 몸이 따뜻해져 한겨울에도 기숙사까지 오는 길이 그다지 춥지 않게 느껴졌다.
코스기유는 동네 센토 이후 나의 두 번째 센토였는데, 이럴 수가. 진짜 센토는 이런 것인가. 우리 동네의 센토는 100년 전 쇼와 시절의 센토 모습 그대로 후지산을 배경으로 탕이 딱 하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에도도쿄건축정원에 가면 1929년 쇼와 초기 시절 만들어져 실제 운영했던 고다카라유(子宝湯)를 그대로 옮겨와서 전시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 동네 센토는 이 고다카라유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샤워기도 딱 두 개뿐.
그런데 코스기유는 자리마다 샤워기가 있으며 무려 탕이 4개..! 심지어 탕마다 입욕을 즐기며 읽어볼 수 있도록 소개하는 안내문이 코팅되어 벽에 붙어있으며, 탕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지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나는 그 안내에 따라 따뜻한 밀크탕, 좀 더 뜨거운 열탕, 그리고 냉탕에 번갈아 들어가는 것을 서너 번 반복하며 몸의 피를 돌게 했다. 냉탕에 들어가는 건 좀처럼 즐기지 않는 편인데, 실제로 이렇게 해 보니 혈류 개선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후로 나는 온천이나 센토에 갈 때 냉탕이 있으면 열탕이나 사우나 후 냉탕에서 몸을 잠시라도 식히곤 한다.
만족스러운 입욕을 마치고 나오면, 대합실에는 책장 가득 만화책이 꽂혀 있으며 냉장 쇼케이스에는 흰 우유와 딸기우유, 요구르트, 커피우유 등 다양한 유제품을 팔고 있다. 목욕을 하고 나와 병우유를 한 잔 들이키는 게 이곳의 센토 문화. 몸을 데우고 나왔으니 시원한 우유로 에너지와 수분을 보충하는 것이다. 고민하다 딸기우유를 하나 집어 들고 책장에선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터치'를 꺼냈다. 노곤하고 차분해진 몸과 머리. 벽에 기대앉아 우유를 마시며 좋아하는 만화를 읽으면 그건 그냥 천국이나 다름없다.
2026. 03. 13.
코스기유에 다녀온 며칠 뒤 나는 B의 제안으로 도쿄 이나기시의 카케노유(花景の湯)에 다녀오게 된다. 지난 2월 우리는 산리오 퓨로랜드에 갔었는데, 그날 테마파크에서 즐기고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바로 옆에 있는 온센에 함께 다녀오며 우리는 서로의 알몸을 텄다. 이야기를 나누며 목욕하니 괜히 더 지그시 탕에 들어가 있게 되어, 더 온전히 몸과 마음을 녹이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그리고 목욕을 이미 한 번 같이 다녀온 이상, 앞으로 두 번 세 번은 더 이상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얼마 후, B가 나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며 연락을 보내왔다. 내향형 인간인 그녀로부터 어딘가를 함께 가자고 제안받는 일은 반갑고 기쁘다. 온센과 센토 전문가 아니랄까 그녀가 가고 싶다는 그곳이 바로 카케노유라는 온센이었다. 카케노유는 요미우리랜드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최근 세계 최초의 포켓몬 파크가 최근에 오픈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우린 포켓몬 파크가 아닌 온센 카케노유를 이용하러 요미우리랜드를 방문하게 된다.
온센 마니아 B의 마음에 이 온센이 들어온 이유는 바로 이 노천탕. 반짝이는 도쿄 시내의 야경을 볼 수 있는 노천탕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방문했을 땐 '하나비요리'라는 요미우리랜드 내 정원의 입장권과 이 온센의 입장권을 묶어 1500엔에 판매하고 있어 낮에 정원을 구경하다 저녁에 온센을 즐기기로 했다.
게이오요미우리랜드역(京王よみうりランド駅)에 내리면 카케노유까지 무료로 운행하는 버스를 탈 수 있다. 이 버스를 타고 하나비요리와 카케노유가 있는 곳까지 가는 데는 5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 소요되는데, 과연 뷰가 멋진 곳이라 그런지 꽤나 높은 산간을 올라가는 것 같았다. 거리상으론 걸어서 가도 문제가 없는 거리이다만 꽤나 체력을 요하는 가파름이었기에, 버스를 타기를 잘했다고 우린 이야기했다.
흐렸던 날씨의 탓도 있겠고,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아 하나비요리는 다시 오고 싶을 만큼 인상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이외에도 도쿄 도내에는 멋진 정원이 정말 많기 때문에 정원을 보러 여기까지 오진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이 글은 센토와 온센을 다루는 글이므로, 하나비요리에 관한 감상은 이 정도로 마치고 바로 온센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들어가기 전까진 몰랐는데 들어가서 알고 보니 이 '카케노유'는 올해 개장 2주년을 맞은 따끈따끈한 신상 온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로비나 신발장 등 전반적인 시설이 굉장히 깔끔했고 입장권 구매나 내부 시설을 이용한 금액에 대한 결제도 전부 키오스크로 할 수 있었다. 도쿄 23구 내가 아닌 외곽에 위치하여 공간도 굉장히 넓었으며, 수건과 관내에서 입을 수 있는 우리나라로 치면 찜질복 같은 편한 옷, 각종 어메니티와 일회용 속옷까지 전반적으로 제공되는 것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 온센의 진가는 이러한 외부적 시설이 아닌 온센 내부 그 자체에서 드러난다. 탈의 후 온센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온탕 두 개가 있으며, 야외로 나가면 이벤트탕 하나와 도쿄 시내 뷰를 볼 수 있는 노천탕이 두 개나 있다. 우리는 실내에서 간단히 입욕 후 두근대는 마음을 품고 노천탕으로 향했으며, 노천탕에 들어가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려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표정으로 감동을 공유한다. 저 멀리 보이는 도쿄의 도심 경관 속에는 스카이트리가 선명하게 보이며, 긴가민가하지만 도쿄타워로 추정되는 건축물도 보인다. 그리고 높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어 이쪽의 산과 대비되면서도 또 동시에 멋지게 어우러지는 풍경을 만든다.
어두워지고 나니 그 풍경은 더욱 장관이었다. 낮에 긴가민가했던 그 건축물은 빨간빛을 내는 도쿄 타워임이 분명해졌다. 도쿄 타워는 건물들과 함께 반짝이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도쿄 타워를 꽤 여러 번 봤는데도, 도쿄 타워는 정말이지 볼 때마다 설레고 벅찬다. 이렇게나 멀리서 아주 작게 보일 뿐인데도 여전히 설레고, 벅찼다. 어떤 건축물을 보며 품게 되는 경외감은 무엇일까. 무조건 크고 압도되며 멀리서도 잘 보인다는 조건으로만 생기는 감정은 아닌 듯한데. 도쿄 타워는 에펠탑을 모델로 만들어졌다는데, 과연 두 타워는 외형이나 세계적인 랜드마크라는 것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낭만, 벅참, 감동, 경외감 같은 무언가를 불러일으킨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따뜻한 온천물 속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도쿄의 야경이란. 온센이나 센토는 당연하게도 내부에서 촬영이 금지되기 때문에, 그 풍경을 눈으로만 담아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멋진 풍경이었다.
역시 온센을 하고 나왔더니, 집으로 돌아가는 몸이 무겁지 않고 개운하다. 따뜻한 물이란 몸과 마음을 풀어주고 깨끗하게 해주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도쿄 도민들은 하루의 마무리에 센토나 온천을 찾는다.
온천은 도내에서 찾기 어려울 수 있지만, 센토는 동네마다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도쿄에 온다면 하루쯤은 꼭, 머무는 동네의 센토에 찾아가 보기를. 도쿄의 하루는, 센토에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