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은 이유가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누군가에게는 바쁜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우울한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시간이다. 나에게는 그냥 토요일이어서, 적당히 아침에 일어나 토요일에 하려던 일을 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주방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물을 트니 수도꼭지 틈새에서 물이 위아래로 솟구친다. 아마 수도꼭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노후되어 빈 틈이 생긴 것 같다. 수도꼭지가 안 나오면 물을 안 쓰면 안 되는 일 아닌가 싶겠지만, 나는 보통 주말에 요리를 한다. 그리고 요리는 설겆이가 잔뜩 나오고, 설겆이는 많은 물을 필요로 한다. 펑펑 나오는 뜨거운 물을.
일단 아무리 생각해도 수도꼭지를 지금 당장 고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거기서 수도꼭지를 붙잡기보다는 다음 일정을 진행하기로 했다. 토요일 아침에 고정적으로 가는 목욕탕을 갔다가 동네 유명 빵집에 가서 크리스마스 기념 케이크를 사 왔다. 집에 와서 케이크를 빨리 냉장 보관한 뒤, 대형마트에 가서 교체용 수도꼭지를 사 왔다. 수도꼭지를 조이고 있는 너트만 풀면 쉽게 교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집에 있는 그 어떤 도구로도 너트를 돌릴 수가 없다. 집에서 여태 돌려본 너트는 아주 작은 것이나 나사 정도뿐이라, 수도꼭지 주위를 조이고 있는 큰 너트는 돌릴 수가 없다. 결국 어떻게 해도 방법이 없겠다는 생각에, 다시 집을 나서 근처 잡화점으로 갔다. 추운 날 매우 귀찮지만 어쩔 수 없었다.
4층짜리 잡화점을 뒤져서 결국 저렴한 가격이지만 너트를 붙잡을 수 있는 도구를 샀다. 이젠 교체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부풀어 집에 도착해 너트를 풀려는데, 어찌나 강하게 조여졌는지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는다. 갖은 힘을 다해 돌려 볼까 해도, 오래된 수도꼭지가 시멘트 벽을 뚫고 튀어나와 있는 것이 자칫하면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쉽사리 힘을 줄 수도 없다. 결국 무슨 짓을 해도 수도꼭지는 고칠 수 없는 것 같다. 요리는 어떻게 하고 설겆이는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진다.
어쨌든 물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기에, 잠시 생각을 했다가 설겆이를 화장실에서 하기로 하고 토요일에 해 보려고 했던 것을 하나씩 해 보았다. 고기 요리도 해 보고, 쿠키도 구워 보고, 빵도 구워 보고, 간식도 틈틈이 줏어 먹는다. 그리고 산더미 처럼 쌓인 설겆이를, 화장실 바닥에 목욕탕 의자를 깔고 앉아 처리한다. 뜨거운 물로 한번 대충 닦아서, 세제로 설겆이 한 다음, 다시 뜨거운 물로 씻어서 마무리 한다.
왜 하필이면 토요일에 수도꼭지가 고장났는지, 찬기 올라오는 화장실 바닥에 의자 깔고 앉아 양말 끝부분에 차오르는 습기를 느끼면서 허리 아프게 설겆이를 하고 있는지. 점점 안 좋은 생각으로 마음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지만, 그 안 좋은 생각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은, 이미 몇 년 전에 깨달아 버렸다. 어쨌든 설겆이를 못 하는 것은 아니기에, 다행히 설겆이를 마치고 토요일에 하려던 것을 모두 마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늦게까지 늦잠을 잤다. 엄마도 수도꼭지를 쓰셔야 할 텐데 물이 새어나와서 도저히 쓸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쓰셨을까 하는 생각에 부엌으로 가보니, 웬걸. 엄마는 수도꼭지를 비닐로 싸매놓으셨다. 새어나오는 물은 비닐에 막혀서 그냥 씽크대로 떨어지고, 수압이 조금 약해졌지만 문제없이 주방 수도꼭지를 쓸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수도꼭지를 고칠 수 없다면 수도꼭지에서 물이 샌다는 문제만 임시방편으로 처리하면 되는 것인데, 나는 어떻게든 수도꼭지를 고치겠다는 생각으로 너트를 돌리려고 그 고생을 하고 화장실에서 설겆이를 했다. 나는 어떻게 그 생각을 못했을까.
역시 어른은 다르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