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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구 Feb 03. 2021

내가 여기 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니까 01.

대전 고려당 헌책방 장세철 할아버지

“모든 책은 이어져 있어. 헌책의 바다는 그 자체가 한 권의 커다란 책이야.”

“… 너 대체 뭐하는 아이니?”

“난 헌책 시장의 신이야.”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중에서




헌책 시장에서 일어나는 온갖 신기한 일을 관장하는 신이 정말 있을까? 갖고 싶었던 책과 우연히 만나게 하고, 헌책방이 거액의 매매를 드라마틱하게 성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신. 그런 신이 정말 있다면 나도 한번 만나 보고 싶다. 취미가 뭐냐고 묻는다면 독서라고 말하곤 하지만 나는 사실 책에 대해 잘 모른다. 헌책 시장 신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게 많다. 나는 어떤 책을 만나야 할까요. 나는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요. 


대전 동구 원동. 중앙시장 끝엔 헌책방이 모여 있다. 책은 책방을 넘어 거리까지 뻗어 나왔다. 1970년대엔 이 거리에 30여 개의 헌책방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책은 거리로 뻗어 나온 게 아니라 조금씩 밀려나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대여섯 곳 정도 남은 헌책방을 기웃거려본다. 빛바랜 책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넌, 뭘 보고 싶어서 왔는데?’ 그러면 나는 놀라 책방을 나온다. 글쎄, 나는 뭘 보고 싶은 걸까. 그걸 나도 알고 싶다.


헌책방 거리 끝에 할아버지 한 분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다. 굽은 허리, 베이지색 야구모자를 눌러 쓴 할아버지는 책방에 가득 찬 책에 밀려 거리로 나온 듯하다. 책방 앞엔 책 무더기가 가게 지붕에 닿을 듯이 쌓여 있다. 책에 자신이 있을 곳을 양보하는 사람이라면 책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많아. 예를 들면 책을 쓴다든지, 연구를 한다든지, 문헌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책을 수집 한다든지. 책의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야.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싶은지에 대해 정확하게 이야기해 봐.”

나는 참 바보다. 박카스 한 박스 사 들고 책방을 기웃거리다 결국 묻는 질문이 ‘좋은 책은 무엇인지 알고 싶다’라니.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냥 물어봐. 내가 도와줄게.”

고려당 헌책방. 52년이 넘게 자리를 지킨 장세철 씨(86세)는 이상한 질문을 하는 낯선 손님에게 편하게 이야기하라며 선뜻 앉을 자리를 내어줬다.


책방에 앉아 있으니 멀리 떨어져 바라보던 모습과는 다른 책방의 바쁜 일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책방 앞으론 많은 리어카와 오토바이가 멈춘다.

“이번엔 사전 세 개 가져왔어.”

오토바이 뒤에 잔뜩 파지 박스를 실은 할아버지가 파지를 줍다 쓸 만한 책을 발견했다며 찾아왔다. 장세철 씨는 고맙다며 이천 원을 주고 책을 산다.

“책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많아. 그런 사람들이 가끔은 좋은 책을 가져올 때도 있지. 그래서 책을 가져오면 우선 사고 있어. 주위 사람들과 두루 좋게 지내야 해. 그래야 좋은 책이 내게 들어온다고.”

장세철 씨는 웃으며 방금 산 책 세 권을 높게 쌓인 책 무더기 위에 올렸다.


고려당엔 책이 일상적으로 들어온다. 집 청소하다 발견한 책부터 책방에 두라고 놓고 가는 책까지. 가끔은 집에 있던 책을 가져와 책방 책과 교환해가는 손님도 있다. 고려당은 마치 드넓은 책 시장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끝낸 책들이 쉬러 오는 곳 같다. 그 중엔 오래된 책도 많다.

“1910년대 이전에 나온 책을 고서라고 해. 이런 고서는 진본이 있고 진본을 그대로 복제한 영인본이 있지. 헌책방엔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고서들을 찾아 보관하기도 해. 이런 책은 한문은 필수로 알아야 하고 또 서지학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하지. 책방을 운영하려면 그런 책의 가치를 볼 줄 알아야 해. 이게 목판본인가 활자본인가 확인할 줄 아는 그런 거 말이지.”

장세철 씨는 책 무더기 속 흰 봉투에 싸인 책 하나를 꺼낸다. 최근 대학교수가 두고 간 책이라고 한다.

“대학교수님이 가지고 있던 책인데 한문이랑 거리가 먼 분이라 여기서 필요한 다른 책이랑 바꿔 갔지. 『열성어진』이란 책이야. 근데 좀 아쉬운 건 맨 뒤에 언제 만든 책인지 단기가 쓰여 있지 않아.”

한자를 잘 모른다고 하니 한문 한 자씩 풀이해주며 책을 소개해준다. 역대 조선 왕들을 간략히 그린 어진과 조선 왕들의 문학작품이 담겨있는 책이다. 


“대학교수님들이 정년 퇴임할 때 가지고 있던 책을 정리해. 그중 학교 도서관에 들어가지 못하는 책도 많지. 그런 책이 헌책방에 들어와.”


고려당엔 언제 어떤 책이 들어올 지 알 수 없다. 헌책방은 기본적으로 우연의 연속인가 보다. 찾고 싶은 책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정말 확고한 신념을 가진 헌책 수집가들은 모두 매일 밤낮으로 헌책 시장의 신에게 기도한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장세철 씨는 고서에 관심이 많으면 고물상에 가서 책을 한번 찾아보라고 한다. 가끔 고물상에서도 좋은 책이 나올 때가 있다며 말이다. 고물상에 뭐 특별한 게 있나 싶지만 정말 특별한 게 있다. 장세철 씨가 책방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고물상에서 발견한 책이었다.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왔지. 충남대학교에 뒷산이 있잖아. 거기에 원두막이 있었지. 하루는 서무과장이 ‘너, 원두막 좀 지켜라’ 했어. 내가 학교를 56년에 들어갔는데 그때만 해도 주변 사람들이 학교 나무를 잘라 땔감으로 쓰는 일이 많았거든. 그래서 나무를 지키기 위해 원두막이 있던 거지. 그래서 원두막에 올라 있다가 우연히 학교 근처에 있는 고물상 아저씨가 미군 부대에 다니면서 고물을 가져오는 걸 보게 된 거야.”

장세철 씨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서대전역 쪽에 미군 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원두막에서 발견한 고물상 아저씨 고물 중엔 미군 부대 기지 내 매점에서 나온『타임』지나『뉴스위크』도 함께 섞여 있었다. 컬러 인쇄가 흔하지 않던 시대였기에 알록달록한 잡지는 확실히 눈에 띄었다. 돈이 되겠다 싶어 이 외국 잡지를 가져다 팔았다. 원동국민학교 담벼락에서 시작했다. 현재 ‘대전청소년위캔센터’가 있던 곳으로 현재 고려당 책방에서 그리 멀지 않다. 당시 학교 담벼락에 기대 책을 파는 노점이 많았다 한다. 고물상에서 가져온 책들은 반응이 좋았다. 박스째 팔리는 건 기본이었다. 


“그때부터 책방과 인연이 시작된 거지.”'



-위 글은 대전 <월간 토마토> 잡지에 썼던 글을 리라이팅 했습니다. -<월간토마토> vol. 157 사람에게 말을 걸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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