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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구 Nov 17. 2022

도시를 사랑하는 방법_6

성공적으로 말 안 듣는 방법

성공적으로 말 안 듣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심지어 아무도 화낼 필요 없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깨닫고 나서 저는 이마를 탁!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태껏 왜 이 쉬운 방법을 몰랐을까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사소한 일들을 어기는 겁니다.


자취하고 나서 엄마 몰라 아침밥 안 먹기, 대표님 없을 때 점심 먹고 여유롭게 산책하기, 새벽에 라면으로 야식 먹기 등등. 사소한 일탈이 때로는 더욱 짜릿한 법입니다. 심지어 너무 사소하고 신경쓰지 않는 일들이니 상대방도 기분 나쁠 틈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공존인가! 

요즘 가장 짜릿한 일탈을 하나 즐기는 중입니다. 바로 곧 사라질 건물에 들어가기입니다.


잡지사가 있는 곳은 중동. 대전의 원도심입니다. 그중에서도 인쇄골목. 길을 걷다가 좀 오래되었다 싶은 건물을 유심히 보면 일제 강점기 때 지었을 법한 건축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꽤 있습니다. 예전에 사무실에서 직접 밥을 해 먹을 때 근처 쌀집에 가서 쌀을 사 왔는데 그 건물도 밖은 벽돌집이었지만 내부에 들어서니 일제 강점기 나무 골격이 그대로 살아있었습니다. 이곳은 그런 동네입니다. 과거의 유물이 그대로 남아 퇴적되는 곳.


요즘 들어 빈 건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엔 회상사 건물도 큰 건물에서 작은 건물로 옮겼습니다. 족보를 만드는 출판사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족보 만들려고 자료를 잔뜩 싸가지고 와선 회상사 근처에 있는 숙소에 일주일간 묵으면서 족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건물은 으리으리합니다. 그런데 이 건물도 최근에 비었습니다. 


가끔 글이 써지지 않을 땐 여기저기 골목을 쏘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매번 보는 골목이 뭐가 좋으냐 할 수도 있는데 워낙 무심한 성격 탓인지 매번 지나는 길도 매번 새롭습니다. 단어 그대로 새롭습니다. 못 봤던 것들을 새롭게 마주칠 때가 많습니다. 무신경한 탓입니다. 최근에도 골목을 쏘다니다 회상사 건물 외벽이 무너진 걸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틈으로 보이는 내부. 좌우를 살펴 목적자가 없는 걸 확인하곤 얼른 그 틈 사이로 몸을 욱여넣습니다. 아무도 남지 않은 건물에 들어가는 건 그 나름의 짜릿함이 있거든요.


누가 뒤에서 소리치며 혼낼까 봐 발소리 죽여가며 건물 내부를 둘러봅니다. 아마 책을 만드는 공장 구역인 것 같습니다. 벽 곳곳에 '안전제일', '제단실'이란 단어가 붙어있으니까요. 근데 좀 흥미로운 건 벽마다 여러 글들이 적혀있다는 겁니다. 가령 이렇습니다.

"빈곤과 무지, 불의 이것은 우리 힘을 명예롭게 동원할 수 있는 적들이다"

남자 화장실 소변기 앞에서 볼 법한 문구들이 주욱 쓰여 있습니다. 과거엔 족보가 중요했으니 중요한 만큼 나름의 각오를 쓴 건 아녔을까 추측할 뿐입니다.

공장 창고를 지나 옆엔 7층짜리 건물이 있습니다. 멀리서 봤을 때 열린 창문으로 커튼이 휘날리고 있을 정도니 아마 건물 안도 싹 비웠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들어가 보려 했는데 건물 문은 잠겨있습니다. 당분간 조금씩 오가면서 틈을 볼까 합니다.


벽에 걸린 달력을 보니 시간은 2020년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이 바빠 떼지 못하고 시간을 보낸 것인지 아니면 이 공간이 2020년까지 움직이고 멈췄던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둥에 곳곳엔 거울이 남아 있습니다. 빈 집에 들어가서는 거울을 보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거울을 깨지 말라는 이야기도요. 왠지 등골이 오싹해 거울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예전에 오래된 여관을 취재한 적도 있는데 다른 물건들은 다 부수거나 치웠는데 방마다 거울장은 남아 있던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왜 거울 장만 그렇게 방에 남겨놨는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입니다. 소름 끼쳐서 얼른 건물을 나왔습니다. 


사실 버려진 건물도 다 주인이 있으니 이건 가택침입이라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아차차. 쓰고 보니 이건 제 범죄 사실을 고백하는 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조금 변명을 섞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래된 건물을 취재하기 전에 미리 사전 조사를 했던 것이라 하면 어떨까요? 나중에 회상사 사장님과 연락해서 건물을 부수기 전에 함께 건물을 돌아보면서 어떤 일들을 했었고 어떤 자리였는지 들어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취재 기획을 세웠던 치밀한 모습이었다고 말하며 이렇게 제 변명을 마칩니다...! 공장에 써 있었듯 안전 제일..!


ps. 이 건물은 다른 회사에서 샀다고 합니다. 아마 조만간 다른 모습으로 건물이 꾸며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간 모습이 변하기 전에 꼭 한번 취재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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