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훈주 Nov 03. 2022

도시를 사랑하는 방법_5

내 책 읽는 시간은 만 보였다.

가을은 책 읽기 좋은 계절이라 누가 그랬는데... 그렇게 말한 당신, 정말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하다. 가을은 책 읽기 좋은 계절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한 해 밀린 사업 정리하느라 매번 연말에 피눈물 흘리는 중생이 여기 있사온데 말이옵니다.


매번 글을 쓰는 사람이라 하면서도 정작 책 읽는 것에 소홀해버리면 내 글에 갇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매번 서점을 방문하면 '이번에는 그 어느 날과도 다르리라' 다짐하며 책을 사 오지만 그렇게 쌓인 책이 벌써 책상에 네 권입니다. 아아. 책을 읽겠다는 굳은 의지는 어찌 그리 쉽게 사라져 버리는지요. 거리에는 낙엽이 쌓이고 제 책상에는 책들이 쌓입니다. 


제 책상에 쌓인 책을 이야기하는 김에 이번에 산 책을 자랑이나 해 볼까 합니다. 최근 대전 어은동에 있는 생태 책방 '버들 서점'에서 사 온 책입니다. 제목은『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 코로나19를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줬듯, 코로나를 극복하겠다는 의지와 능력이면 기후 위기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코로나19 사태를 보면 인류는 비상 상황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극단적으로 ‘필수’ 요소와 ‘비필수’ 요소를 나눠 통제하고 시민은 따를 수 있었습니다. 인류는 충분히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역량과 힘이 있습니다. 이 책은 ‘코로나19 비상 대응이 가능하면 기후 위기 비상 대응도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코로나19와 기후위기를 같은 선상에서 보면서 주장을 펼치는 저자의 생각이 대담하면서도 재밌었습니다. 네. 물론 20페이지를 읽으면서 느낀 감상입니다. 서점에서 이 20페이지를 읽고 감명받아 책을 샀지만 그 이후 부분은 아직도 열어보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입니다. 네. 30이 지나가는 이 시기에 내 삶을 좀 더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에 산 책입니다. 대흥동 '다다르다'에서 산 책입니다. 저자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에리히 프롬. 여러 문구가 있지만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을 뽑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사랑의 길은 폭력 행사의 길과 반대다. 사랑은 이해하고 설득하며 생명을 불어넣으려 애쓴다. 이런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은 쉬지 않고 자신을 변화시킨다. 더 많이 느끼고 관찰하며  더 생산적이고 자기 자신과 더욱 가까워진다.


폭력과 달리 사랑은 인내를 전제로 한다. 내적 노력을, 무엇보다 용기를 전제로 한다.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실망을 참고 견딜 용기,  일이 잘못되어도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겠다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에리히 프롬 -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요즘 이런 책을 두고 삽니다. 차라리 에세이 책이었으면 좀 더 빠르게 책을 읽었지 않았을까 싶다가도 요즘 생활을 보면 그렇지도 않겠구나 싶습니다. 집에 오면 체력이 다 빠져 그저 누워 있는 형국이라니...


책을 그래도 읽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가을이고, 날이 좋으니 말이죠. 이런 날엔 밀린 빨래도 하고 싶어 지고, 옷장 정리를 하고 싶어 집니다. 그렇습니다. 미뤄뒀던 일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날입니다. 그래서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약속 장소까지 걸어갔습니다. 


제가 책을 읽지 못하는 건 어쩌면 이 세상 탓일지도 모릅니다. 좀처럼 집중이 안됩니다. 이 집중력 저하는 스마트폰 사용 시간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자료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사)한국 전자통신학회 논문지에서 ‘스마트폰에 의한 집중력 관련 뇌파 성분 분석’에 대한 자료를 보면 스마트폰이 종이책보다 집중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국 텍사스 오스틴데 아드리안 워드 교수 연구팀은 2017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스마트폰이 옆에 있기만 해도 가용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줄어든다고 주장하기도 했을 정도라고요. 하지만 이 핸드폰 없으면 이제 간단한 일상생활도 불가능한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제가 책을 읽지 못하는 건 다 이 세상 탓입니다!  에잇! 세상아 덤벼라!


요즘 회사에서도 멍 때리는 날들이 많아지다 보니 정말 심각하게 집중력 키우는 법을 찾아보곤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걷기라길래 책을 들고 갈마동에서 도룡동까지 걸어갔습니다. 이번에 함께한 책은 우리 에리히 프롬 선생님이십니다.


걸으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번엔 오랜만에 정부청사 공원에 들어갔습니다. 정말 가끔 발길을 잃어버렸을 때 찾아가는 곳입니다. 나름 잔디 광장이 넓게 펼쳐져 있어 책 읽기 좋은 곳입니다.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오직 시선은 책에 고정했습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책을 읽다 보니 그 나름대로 재밌었습니다. 거리에 좀처럼 책 읽으며 걷는 이들을 보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은 핸드폰을 볼 테니까요. 나 홀로 19세기에서 시간여행을 온 방랑자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도시는 내가 누군지 모를 거란 착각. 아무도 모르는 곳을 여행한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없이 펼쳐진 백색 공간에 책과 주인공만 남아 사무치는 외로움을 잊으려 끊임없이 사방이 하얀 공간을 계속 걸어가는 그런 영화 장면을 상상합니다. 내가 아는 감정들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은 자기 자신이 실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감정을 단 하나의 단어로 해결하곤 한다 했습니다. 슬픔, 외로움, 그리움, 의심, 안타까움을 '감기'라고 이야기한다 했습니다. 그래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있을까요?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는데 말입니다. 아직도 모르는 것들 투성이인데 그런 내가 길을 걸으면서 책 읽는 시간만큼은 정말로 존재했던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한참을 걸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시를 사랑하는 방법_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