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시작은 피였다. 인간이 피를 먹고 내장을 삶은 건 필연이었을까? 그 기원을 찾아 떠난 그 마지막엔 광활한 사막과 얼어붙은 대지만 남았다. 유목민들이었다. 한동안 유튜브로 가축의 목을 찌르고, 가죽을 벗기며, 그 남은 피를 마시는 영상을 찾아다녔다. 빵이 도시의 역사라면 고기는 유목민의 역사였다. 중앙시장 구석에 앉아 순대를 된장에 찍어 먹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내장의 쓸모
내장을 먹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과거 중국에선 순대를 ‘관장’이라고 표현했다. 순대를 만들려면 먼저 창자를 비워야 했기 때문이다. 유목민이 물이 귀해 피를 마셨다고 하면서 내장을 먹기 위해 물을 쓴다는 건 부자연스럽다. 내장은 처음엔 담는 용도였을 것이다. 몽골엔 ‘보르츠(Борц)’라는 음식이 있다. 오늘날 육포와 같다. 유목민은 말을 타고 계속 이동하는 생활 특성상 고기를 건조한 후 곱게 갈아 가축 위장이나 방광에 넣고 다녔다. 보르츠는 뜨거운 물에 고기 가루를 불려 먹는 음식이다. 또한 양 위는 갓 짜낸 우유를 넣어 보관하기에 좋다. 이 방법은 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유목민들이 지금도 우유를 담을 때 쓰는 방법이다. 이처럼 내장은 탄성 좋은 그릇으로 활용하다가 자연스럽게 요리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날이 추운 툰드라 지방 유목민들은 내장을 직접 요리에 쓰기도 했다. 동물 내장을 말렸다가 조리 과정에서 버터나 기름을 넣듯 내장 지방을 사용하는 것이다. ‘자르꼬에’라는 볶음 요리다. 순록 고기에 내장을 잘라 넣고 볶는 요리다. 재밌는 건 러시아에서도 ‘보르츠’, ‘자르꼬에’와 비슷한 음식이 있다.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그 원형은 유목민이 먹는 요리 형태와 비슷하단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고기는 유목민의 역사였다. 생존의 역사다.
순대의 기원
내장에 음식을 채워 먹기 시작한 유래를 정확히 알 순 없다. 대부분 칭기즈칸 때 그들이 먹었던 순대가 기원이라고 한다. 만주어로 순대를 ‘생지 두하’라 하는데 이는 피와 창자란 뜻으로, 이를 한문으로 쓰면 순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축을 기르는 모든 지역에서 순대의 원형은 찾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유럽에선 블러드 소시지가 있다. <미각의 역사>란 영국 사이트에선 블러드 소시지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며 호머의 『오디세이』 18권에 블러드 소시지가 고대 역사에 처음 출현했다고 한다. 그 원문은 아래와 같다.
“Here at the fire are goats' paunches lying, which we set there for supper, when we had filled them with fat and blood.” (우리의 저녁 식사를 위해 지방과 피로 채운 염소를 불 앞에 두었다)
보다 친숙한 순대 요리법은 고대 최초의 요리책이라고 불리는 『요리에 대하여』라는 책이다. 아피시우스가 썼다 추정되는 책에선 우리가 잘 아는 순대와 같은 요리법이 나온다.
“삶은 달걀, 다진 잣, 양파, 얇게 썬 부추와 계란을 고기, 피와 섞는다. 그리고 장에 채워 와인으로 요리하라.”
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가축 창자에 피를 채워 먹는 음식이 있다. 영국은 블랙 푸딩이라고 하며 브리트니스 백과사전엔 영국식 아침 식사에 필수 음식이라고 서술한다. 프랑스에서는 브뎅 누아르라고 부르며 가장 오래된 샤퀴테리라고 정의한다. 재밌는 것은 유럽 사이트에선 블러드 소세지 기원을 호머 오디세이를 빌어 고대 그리스 요리사들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서술하며, 동양권 사이트에선 몽골 제국에서 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순대의 기원을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요리에 진심인 프랑스의 한 미식 사이트에서 멋지게 정리해 주었다.
“푸딩의 기원은 시간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돼지고기와 멧돼지 사육 역사가 8,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고기를 요리하는 예술이 나타난 시기도 오래되었다. 선사시대의 긴 과정을 추적할 수 없듯, 고기를 먹은 갈리안인들의 정확한 시점을 우리가 알 순 없을 것이다.”
음식의 경계
유목민들이 땅의 경계를 나누지 않았듯 고기 조리법 원조를 찾는 것은 무색한 일일지도 모른다. 음식은 문화라고 말하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순대와 순대국밥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보단 어떻게 우리 삶에 녹아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대전 중앙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전 중앙시장 초입엔 순대 골목이 있다. 길 한 가운데에 큰 알전구를 켜두고 순대를 쌓아둔 작은 마치가 이어있다. 덕분에 길이 환하다. 큰 알전구 하나당 가게 하나인데 어림잡아도 동그란 불빛이 10개가 넘게 이어져 있으니 그 광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조금 늦은 점심시간에 빈자리에 앉아 순대를 시킨다. 한 접시에 만 원이다. 음식은 주문이 들어오면 마치 토렴하듯 채에 넣고 따뜻하게 적셔 나온다. 한 접시에 순대와 간, 허파, 오소리감투와 머리 고기가 나왔다. 조금 양이 적다 싶었지만, 시장 순대는 한 접시를 비울 때 즈음 다시 시작한다.
“간 좀 먹을 줄 아나? 좀 줄까?”
접시가 반쯤 빌 때 갑자기 간을 쌓아 준다. 그 후로도 오소리감투와 순대도 접시가 비어갈 때 즈음 숭덩숭덩 썰어 준다. 눈앞에 놓인 애기보와 막창 순대에 관심을 가지며 이것저것 물어보니 맛 좀 보라며 몇 개 썰어 준다.
“여기 순대 거리는 오래됐나요?”
“오래됐지. 내가 10살 때도 있었으니까.”
“지금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70.”
주인 할머니는 다른 사람이 했던 자리를 이어받아 20년째 순대를 팔고 있다고 했다. 10살 때도 있었던 익숙한 거리를 지나며 계속 봐 왔던 곳에 삶이 돌고 돌아 자리를 틀기까지 사연이 없진 않겠으나, 그 이야기를 다 물을 순 없었다. 순대가 그런 음식이다.
순대가 대중화된 것은 1960년대, 정부에서 양돈산업을 육성한 시기다. 이전엔 고기가 귀했던 시기였으니 순대도 귀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당면순대가 1970년대 등장한다. 당면순대 시초가 당면공장에서 생산 후 남은 당면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 것처럼 당면순대는 저렴한 순대다. 이때부터 순대국밥도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돼지 도축은 늘어나고 살코기 이외 거의 모든 부속 고기를 이용해 만드는 순대와 순대국밥은 값이 싸고, 대중 입맛을 잡기에 충분했다. 전통시장마다 꼭 순대국밥집이 있는 이유다. 대전 중앙시장에 순대 골목이 생긴 것도 70년대 그쯤이 아닐까 싶은 건 근처 상인들의 기억과 순대가 값싸게 대중화된 시기가 맞물리기 때문이다.
순대를 지역에 따라 특색을 나누기도 하지만 그건 어쩌면 이야기 만들기 좋아하는 글쟁이들이 만든 경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집마다 만드는 순대는 마치 김치와 같다. 피를 많이 넣어 피순대를 만들기도 하지만 각종 야채와 잡내를 잡기 위한 한약재, 고소함을 추가하기 위한 견과류부터 맛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비계까지 다양한 재료를 각자 스타일대로 넣는다. 대중이 많이 찾는 음식엔 경계가 없다. 그저 그 음식에 담긴 추억만 남을 뿐이다.
순대국밥. 그 한그릇 이야기
“예전엔 순대 팔면 부자 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하던데 지금도 그래요?”
“뭘. 지금이야 추워서 사람들이 오지. 날 더워지면 잘 안 앉아.”
주인 할머니는 씁쓸히 웃었다. 시장 한 가운데 앉아 각종 내장을 먹으며 지나는 풍경을 본다. 주인 할머니는 자주 오는 단골에게 주머니에서 금귤 두 알을 건넨다. 단골은 그 두 알 중 하나는 옆 가게 사장에게 건넨다. 각자 금귤을 먹고 그 안에 씨가 몇 개 들었는지 공유한다. 요즘에는 사람을 돈 내고 카페에 앉아 만난다지만 시장은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난다. 순대 한 접시를 핑계 삼아 술 한 잔 놓고 서로 웃고 떠드니 과거, 순대는 값싼 핑계였겠구나 싶다.
대전 중앙시장 식당 간판을 보면 다양한 지역 이름을 찾을 수 있다. 공주, 전주부터 이북에서 한국 전쟁 때 내려와 자리 잡은 식당도 있다. 다양한 이들이 각자 사연을 가지고 짐을 풀었던 곳이다. 다음날, 중앙시장 안에 순대국밥 집 하나를 찾아 다시 갔다. 대전 3대 순대 국밥집이나 직접 순대를 만드는 곳을 찾는 일은 그만 두기로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순대국밥을 바라보았다. 툰드라 지방에서 순록을 사냥하다가 곰에 물려 죽은 아버지 뒤를 이어 총을 손질하는 아들 이야기가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