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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훈주 Oct 11. 2024

11. 우리의 관계에 이별이랄 것도 없어서

지렁이는 가끔 불쑥불쑥 땅 밖에 솟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

“이번엔 내가 갈게.”


언젠가. 규현이를 만나러 가야겠단 생각은 지렁이처럼 머릿속을 꾸물거렸다.


땅을 두드리면 지렁이가 올라와. 왜냐면 땅이 울리면 비가 오는 줄 알거든. 그렇게 나온 지렁이는 메마른 땅에서 꾸물거리다가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간다고. 


현 오빠는 이런 말을 어쩌다 했더라. 아마 밥을 먹으면서 했을 거다. 대부분 시답지 않은 만 밥 먹으면서 했다. 그리고 그 말들이 우습게도 자꾸 머릿속에 남았다. 아무렇게나 툭 던진 말인데 나는 그 말들을 주워 담아 어딘가에 꼬깃하게 보관하는 거였다. 지렁이가 마른땅 위에 올라와 머쓱하게 다시 들어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끔은 규현이 생각나곤 했다.





“나중엔 내가 밥 살게.”


그 말 한마디에 규현이는 며칠이고 나를 기다릴 거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정말? 그럼 나야 너무 좋지”


톡으로 오가는 대화 속에서도 규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 그게 좋았고 또 그래서 슬퍼진다. 


“너는 글 보면 딱 너 글인 거 티 나는 거 알아?”

“그래?”

“어. 그래서 조금 소름 돋아.”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그때 그냥 웃으면서 대답을 미뤘다. 규현의 글을 보면 얼굴이 떠올랐다. 웃는지, 우는지. 그게 한 때는 좋았고 또 그 익숙해짐이 싫었다. 선배. 저는 선배가 제 글 읽어주면 좋아요. 규현은 가끔씩 자신이 쓴 습작들을 pdf로 묶어 보내곤 했다. 한땐 열심히 읽어줬지만 어느 순간부터 카톡 어딘가에 쌓아 두고 상투적인 말을 건네곤 했다. 고마워. 잘 읽어볼게. 규현의 pdf를 생각하면 머릿속 어딘가 아직 땅 속에 들어가지 못한 지렁이가 떠오르곤 했다.


예전 규현 집을 찾아간 적이 있어 그 기억을 더듬어 갔다. 오르막길에 ‘축 개발’이란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이미 동네 반 쪽은 평평하게 건물들이 밀린 후였다. 이렇게 좁은 땅이었나. 구불대고 오르내리던 길과 오밀조밀한 집들이 있던 곳은 고작 저 정도 땅에 붙어 아웅 댔구나 싶었다. 


“대나무숲도 밀렸더라.”

“응. 재개발한다고 했는데 정말 다 밀어버리더라고. 아쉽긴 했는데 어쩔 수 없구나 싶기도 하고. 또 그러면 웃기게 막 무력해진다? 사실 나랑 저 대나무숲은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데.”


규현이 웃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대나무숲에 묻어 버리자. 우리의 이야기는 밤새 이어졌고 그때마다 마음속에 대나무를 심었다. 그러다 규현 집을 오간 후엔 머릿속으로 규현네 근처에 있던 대나무를 생각하곤 했다. 여름에 산책하면 좋아요. 스산하기도 하고 댓잎 소리가 좋거든요. 규현은 여름에 또 오라고 했었고, 그때는 겨울이었고 그리고 한참이 지나 이렇게 다시 규현을 만났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니까 이상하다 그렇지?”
 

규현이 웃는다. 규현은 자주 웃었다. 눈은 웃지 않았지만. 남이 불편해 보일 때 괜히 먼저 웃었다. 


“뭐가 이상해. 조금 낯설긴 하다. 이렇게 다 밀린 줄 몰랐지.”

“말해줄걸. 미안해.”

“미안할 건 없지 뭘.”

“그럼 우리 뭐 먹을까? 뭐 사 주실 건가요. 선배님!”


그냥 밥 한 번 사는 건데, 커피 한 잔 사는 건데 규현을 만나러 오는 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웃는 규현을 보면 그렇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규현의 마음이 짐작되니까.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나왔다. 그렇지만 또 우리 사이에 이별이랄 것도 없어서 목에 힘을 주다가도 혼자 민망해지는 거였다. 




오래전 걸었던 길은 사라졌고, 대나무숲도 사라졌다.

규현과 함께 했던 잠시 시간은 묻어두었다 싶었는데 

지렁이는 자꾸 불쑥 솟아올랐다.

야. 아직 비는 오지 않았어. 어서 들어가.

나도 딱히 비를 생각하고 오진 않았어. 

지렁이는 꿈틀꿈틀 거린다. 우리 사이는 뭐였어? 규현이 물었던 날이 있었다. 지렁이를 밟는다. 꿈틀거린다. 우린 뭐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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