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인간은 쓸모가 있을까?
울산으로 다시 이사했다. 전세 자금 대출받고 처형께 돈을 빌려서 주공 아파트에 입주했다. 환기구가 있는 화장실, 깨끗한 주방, 넓은 거실, 아늑한 방 두 개. 이전에도 이런 아파트에 살았지만, 지금처럼 행복하지 않았다. 천국 같다.
용접 기능사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10년 동안 성공을 경험한 건 이것밖에 없다. 이제부터 인생이 좀 밝아지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실기 학원을 알아보니 모집 기간이 마감되어서 내년에 등록하라고 한다. 일 년을 기다려야 하다니! 기가 찬다. 낙심만 할 수 없어서 울산고용지원센터에 갔다. 그림만 그려온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단다. 나는 뭘 해야 할까?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쓸모가 있을까? 지금이 바닥이라고 생각하고 일어나면 더 깊은 바닥이 있다. 지금 같은 바닥은 없다며 다시 일어나면 또 바닥, 다시 바닥, 계속 가라앉는 바닥만 있다. 어디에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바닥이 없다.
어머니 전화가 왔다. 그림책 원고 한 번만 더 투고해 보라고 하신다. 버럭거리며 화를 냈다. 그만 좀 하시라고. 이제 좀 포기하시라고. 몇 번이나 설득하는 카톡을 받고 나서야 겨우 원고 투고 했다. 기대하지 않는 마음으로. 그런데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보자고 한다. 계약하자는 건 아니고. 어머니와 함께 출판사가 있는 서울에 가기로 했다. 간 김에 그림책 NOW 전시회도 보자고 하신다. 그러자고 했다. 어차피 용접 기능사가 될 테니 예술인을 꿈꿔오던 마지막 순간을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6월 25일, 서울이다. 출판사 대표와 함께 있다. 어머니께서 주신 그림책 원고가 많아서 그렸던 다양한 스타일의 포트폴리오를 보여 줬다. 출판사는 그림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며 삽화를 그려달라고 한다. 지금 맡고 있는 삽화가가 너무 까다로워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한다. 망설여진다. 의뢰받은 원고로 그림을 그려도 시안이지 않은가? 의뢰해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버릴 수 있는 내 위치는 일회용이다. 그동안 너무 많은 실망 속에 지칠 대로 지친 나다. 여기서 무너지면 다시 못 일어날 것 같다. 걱정과 두려움이 짓누르자 나도 까다로워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든다. 생각해 보겠다며 마무리 짓고 점심 먹으러 갔다.
조촐하고 저렴한 한식 뷔페는 직장인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을 보고 있는데 왜 내가 보이지? 푸석한 피부, 빠진 머리카락, 허름한 옷, 낡은 신발이 보인다. 숙인 고개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나갈수록 꼿꼿해진다. 잡채를 더 집어 가자, 식당 사장님이 '쯧' 하며 혀를 찬다. 우연의 일치인지 자격지심인지 확인할 수 없는 애매한 감정에 얼굴이 붉어진다. 자리에 앉아 꾸역꾸역 먹고 있는데 전화가 온다.
안녕하세요? 씨드북 출판사인데요. 김희진 작가님이시죠? 투고한 원고 보고 전화했어요.
씨드북? 작가? 모든 것이 얼떨떨하다. 울산 살고 있는데 마침 서울이라고 했더니 당장 만나자고 한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출판사에 갔더니 계약하자고 한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지? 일단 생각해 보고 연락하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정신이 번쩍 든다. 도대체 내가 뭘 한 거지? 미친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