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에 나는 포도를 좋아한다. 새콤하고도 달콤한 즙이 입에 머물면 향기마저 온통 보랏빛이 된다. 두 알씩 한꺼번에 입에 넣고 먹으며 껍질의 신 맛이 다할 때까지, 포도씨의 뽀드득 소리까지 집어삼킨다. 그렇게 먹으면 다들 신기해한다. 한 알씩 먹고 포도씨는 먹지 않는 게 당연함인데 나는 희한하게 두 알씩 먹고 있으니 말이다.
포도를 먹고 있으면 이솝우화 중 [여우와 포도]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내용이기도 하고, 그 후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새록새록 어린 시절의 여름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엄마가 포도를 씻으면 우리는 옹기종기 둘러앉아 '톡' 터지는 포도즙을 입에 넣고 포도씨를 툴툴 뱉어내며 참으로 우습게 먹었다. 동생들과 내가 모여 앉아 나누어 먹던 음식의 기억은 소란한 즐거움이다. 넷이 시시덕거리며 장난치던 웃음이 생각난다.
건강한 여름을 보낸 기억을 더한 것은 시원한 그늘에 엎드려 내가 그 속에 빠져든 채 책을 읽을 때이다. 동물들이 우리처럼 말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에는 해학과 실수, 욕심과 자만이 들어 있고 이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심어 준다. 어릴 때 읽었던 이야기가 다시 아이에게 대물림되니 그것이 다시금 조명되는 것이 새롭다.
어른이 되어 읽는 이솝우화는 단지 재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네 살아가는 이야기이기에 담긴 의미가 크다. 포도를 먹으며 읽었던 여우와 포도는 '포기하지 마라'는 단순한 사실을 넘어서서 내가 그것을 원하는지에대한 물음이다. 그 물음에 답을 하여 안 되는 순간이 있지만 적어도 원하지 않았던 '척'으로 변화하지는 말아야겠다. 뒤돌 수 있는 용기도 내가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신중한 판단일 수 있지만 해 보는 데까지 해볼 수 있는 용기, 실패를 통한 경험도 충분히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포도의 품종이 다양해져서 이미 가지고 있던 색깔이며 맛, 크기까지 달라졌다.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지금이지만 어린 시절 나무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나눠 먹던 오리지널의 포도맛은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이다. 두 알씩 배어 먹던 보랏빛 향기는 적어도 나의 시절을 건강히 보낸 맛이다. 내 아이도 훗날 자라서 나처럼 기억하게 될 어린 시절의 여름은 어떤 향을 지니게 될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그 이야기가 잘 담길 수 있도록 스스로 건강하게 이 여름을 잘 안아가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