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든 연결된
가파른 돌계단을 지나 나무숲 우거진 틈 사이로 비치던 햇살은 우리의 땀과 숨결에 더하여 헉헉대다가 이내 조용해진다. 눈앞에 펼쳐진 고즈넉함은 올라올 때의 힘듦을 단숨에 잊게 한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호수는 넓게 펼쳐져 있으며 높은 절벽에 서서 천 년 이상을 이어 왔을 절의 모습은 아담하나 평온함을 길게 주었다.
6월 6일 현충일에 병원 직원들끼리(부부 동반) 대청댐 주변 왕복 20km를 자전거로 돌기로 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로 크다 하는 대청호를 둘러싼 주변의 자연경관은 이미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사계절 드라이브 코스로 찾는 사람들이 많다(봄이면 26km 이상 벚꽃길이 운치를 더하는 곳이기도 하다). 금강 자전거길과 이어진 코스여서 전망대까지 자전거를 타는 분들도 꽤 많다(여기의 별미는 호떡).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게 되니 남편은 전날부터 신이 났다. 저녁나절 꼼꼼히 자전거를 점검하고 나서 아침 일찍 차에 싣고 만나는 장소로 이동하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맑고 푸르른 날씨가 우리를 동행한다.
40여 분을 달려 도착하고 자전거를 내린다. 부부끼리 오랜만에 만나 즐거운 담소가 오간다. 여자들보다 시끄러운 남자들이다. 이동 동선을 파악하고 출발하기 시작하자 몸으로 부딪치는 바람이 시원하다. 때아닌 이른 지금의 더위는 바람을 맞으면 금세 잊힐 만한 날씨다.
도로는 곡선과 직선이 만나 합을 이루고 금강을 종주하는 대청호의 넓은 물길을 따라 우리네 자전거 바퀴도 따라 돌고 돈다. 주변의 풍광을 지날 때마다 내 눈은 카메라가 되어 부지런히 찍어댄다. 길마다 놓인 푸르름은 갈수록 경이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자전거를 타는 것인지, 자전거가 나를 이끄는 것이지 이미 탄력을 받은 바퀴가 물빛을 받아 푸르러진다. 나도 따라 푸르러진다.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뭔가 아쉬운 마음에 대청호 전망대까지 자전거로 가보기로 한다. 평지를 돌 때와 다르게 약간의 업 힐이 있지만 나는 전기자전거라 페달을 밟으면 동산에서 어시스트 할 수 있는 기능이 있기에 서슴지 않고 출발한다. 평지를 뒤로 하고 경사진 도로를 만나니 일행이 뒤처진다. 속도에 맞춰 함께 가려 했으나 이 도로는 자동차와 혼합된 도로라 먼저 가는 순서대로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와 남편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 동안 눈앞에 장황하게 펼쳐진 호수를 실컷 바라본다. 햇빛에 반짝인 윤슬이 물빛 사이로 가느다랗게 소용돌이친다. 보석이 가득 펼치어진 모양새는 바다가 아니더라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의 소망을 품어낸 듯한 느낌이다.
드디어 일행이 왔다. 우리는 그들에게 ‘잘했다’ 손뼉을 쳤다. 보통의 자전거로 멋지게 성공한 그들의 모습은 이미 땀에 젖어 심호흡 한번 길게 들이쉰다. 그늘에 앉아 물을 마시면 비로소 성공의 희열이 눈에 보인다. 자전거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주변을 보니 대청호를 바라보는 산 위에 절 하나가 보인다. 절 이름은 현암사이고 맞은편으로 몇몇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보기에 아찔한 경사를 품은 절은 대청호의 긴 역사를 함께 품어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의 계획이 바뀌었다. 절까지 오르기로 한 것이다.
경사진 계단을 지나면 산으로 이어진 돌계단이 나온다. 나무며 온갖 식물이 산의 정기를 받아 피워내고 자란 자리마다 공기의 숨소리를 바꿔 뿜어낸다.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의 힘에 경탄해 마지않는다. 걷는 것을 좋아하여 약간의 자신감이 붙은 나는 남편의 울상인 표정을 보면서 웃는다. 당당히 앞으로 걸어가 ‘하나, 둘’ 호령을 한다. 자전거로 뒤처졌던 일행은 벌써 앞으로 가고 없으나 15분 남짓으로 올라가는 이 시간을 나는 즐겼다. 풀숲에 난 이름 모를 식물들에 눈이 가고 산딸기나무의 흔적은 겨울과 봄을 이어온 따뜻함이다. 저마다의 소원을 담아 돌을 쌓은 중간 지점을 지나면 높게 올라온 만큼 시야가 넓어진다.
“와, 드디어 성공이다.” 남편을 이끌고 올라온 나름의 성공은 짧은 거리지만 경사로 인한 체력의 고갈은 있기에 이것도 축하할 일이다. 깊게 들이신 호흡은 점차 편안해지고 서서 바라본 호수의 전경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윤슬은 더 빛나고 하늘은 푸르렀다. 절벽에 서 있는 절간의 이름인 현암사는 산과 물의 정기를 그대로 받아 우뚝 서 있다. 이런 곳에 절을 지은 것도 신기한 일이고 하물며 온갖 자재를 직접 가지고 올라왔을 것으로 생각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현암사는 고즈넉하고 따사롭다. 종교를 믿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열린 마음이 있기에 자연스레 몸이 바르게 되고 손을 모으게 된다.
12시가 다 되어 허기가 지는데 절에서 밥을 준단다. “앗, 이게 무슨 일이래?” 절에 와서 절밥이라니!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준비된 여러 가지 산나물과 채소에 찰밥을 비벼 비빔밥을 만들고 시원한 열무김치 한 그릇은 덤으로 따끈한 미역국이 나온다. 먹을 만큼 각자 받아 자리에 앉는다. 음식이 놓인 동그란 회색 양은 쟁반은 그 옛날 레트로 감성을 불러낸다. 절밥은 다 먹어야 하는 룰을 어길세라 배고픈 나그네들은 서로 입에 넣으며 세상 가장 맛있는 표정을 짓는다. 한 그릇 뚝딱 남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먹은 자리는 한 톨의 밥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짜로 밥을 얻어먹었으니 설거지를 한다. 남편과 지인이 나섰고 나는 그릇을 정리한다. 이마저도 참으로 감사한 보답이기에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본다.
배가 부르니 비로소 귀에 선명하게 들린다. 공기도 맑아 나무를 비비던 새의 노랫소리는 이곳의 운치를 더해 한없이 펼쳐진 초록의 힘과 물빛에 있다. 건너편으로 장미를 심어 놓아 꽃향기까지 바람에 실려 와 간질인다. 자전거 일행을 반갑게 맞아 준 절경은 있는 그대로 감사함을 준다. 모르는 누군가와 연결된 세상의 여기저기는 어디서든 살아 숨 쉬는 힘을 주고 있나 보다. 약간의 계획과 변수 사이에서 또 다른 경험을 한 우리는 자연이라는 일상의 고마움을 다시 알아간 오늘이기에 좋은 마음 가득 안고 여유 있게 내려간다. 이제 쉬어갔으니 다시 달려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