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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아 Jul 10. 2024

아낌없이 내어준 사랑은 그리움으로 기억이 된다.

사랑이라는 건

 “정아야. 우리 큰 딸 왔구나.”

보고 싶은 딸을 마주하고 아픈 사실조차 잊은 아빠의 가는 마지막 목소리는 반가움과 그리움, 보고 싶던 첫 아이의 애틋한 사랑을 진하게 품고 있다. 여러 번 입원을 반복하며 이제는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버틴 시절은 10년이 무색할 정도의 기나긴 시름과 힘겨움을 낳았다. 환자인 아빠에게도 남겨진 가족에게도 몹쓸 기억이다. 이제는 남아있는 통증을 대신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곁을 지켜내며 그저 마음으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던 안타까움과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지켜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현실에선 불가능하기에 더 이상이 손쓸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내려놓기 시작한 마음은 무엇이 제대로 맞는 것인지 알지 못하여 내내 무거운 돌덩이를 얹은 기분이 들었다. 여행 한번 못 보내드리고 호강 한번 못 해 드렸다는 후회 안에 켜켜이 쌓인 설움만 가득해진다.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에 대한 위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아빠의 시절은 아주 멀리 훌훌 달아났다. 어디선가 굽어볼 하늘은 이제 아빠의 땅이 되었다. 병상의 숨소리를 대신한 것은 그저 아빠의 가냘픈 손가락을 마주 잡아 천상에서는 아프지 말고 평안히 계시라고 되뇌는 흐느낌뿐이었다.      


10년을 버틴 병상의 기록은 말로 표현 못 할 정도의 애달픔이다. 수없이 반복한 응급상황에서 혹여 주무시다 숨이 거칠어진 순간 엄마와 동생은 사색이 되어 병원을 수도 없이 오가며 전전긍긍이다. 나는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에 쉽게 가보지 못한 미안함은 커졌다. 아픈 아빠를 대신할 엄마의 힘겨움과 동생들의 노고, 그 안에서 나름 버티어간 가족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 할 시절의 순리이자 자연의 법칙이나 마찬가지다. 자연스러우나 왜 그런 고통은 모두에게 주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아빠가 누워 계셨던 병상을 떠올리면 그곳은 그리움이 가득해진 공간이다. 다소 왜소한 체격의 아빠는 어린 시절에도 자주 아팠다. 그때는 의료기술이 지금과 달라 병명을 알 수 없었고 그마저 홀로 계셨던 할머니께서 아빠가 20살 때 하늘나라로 먼저 가신 후 남아있는 가족은 형과 아우밖에 없었다. 워낙 어려운 형편이기도 하고 가난의 굴레가 계속됐던 시절의 이야기는 내가 커가면서 비로소 들리고 볼 수 있었다. 고모들은 이미 어린 시절에 돌아가시고 남은 형제라고는 셋뿐이라 의지할 곳도 딱히 없었다고 한다. 결혼하여 아내를 곁에 두고 자식이 생기며 가족을 이루어가는 사이 아빠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점점 더 생겨나기 시작한다. 특히 첫째인 나는 아빠의 자상함과 사랑을 가득 품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세 살 때 동생이 태어나고 그때 아빠는 새 직장을 구했다고 했다. 초등학교도 겨우 나온 아빠에게 새 직장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애쓰고 버틸 이유로의 가장 큰 기회인 곳이었다. 지금은 보안 시스템으로 운영되지만, 당시만 해도 학교에 수위(경비) 아저씨가 계셨다. 아빠가 그 일을 시작하시면서 온갖 궂은일을 다하셨다. 선생님들의 잡다한 개인 심부름부터 환경, 시설 점검과 묘목 전정 관리, 야간 당직 때 손전등을 비추며 학교 전체 문단속을 하셨던 일들이 기억난다. 아빠가 당직 때마다(학교 숙직실로) 엄마는 저녁거리를 챙겨 가져가셨다. 당직은 이틀에 한 번씩 하시면서 학교 숙직실에서 주무시고 다음 날 또 출근하신다. 학교가 문을 안 여는 일요일에는 쉬셨던 기억이 난다. 당시 선생님들의 권위 의식은 지금과 달랐기에 무시와 멸시 안에 담긴 설움을 버틴 아빠가 그저 대단하다고 느낀다. 34년간 한 직장에서의 긴긴날을 어떤 마음으로 버티었는지 지금에야 비로소 실감이 난다. 어려움을 극복한 나름의 시절 속에서 익숙해진 업무로 조금씩 당당해진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그 인내를 가지게 한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가난의 굴레와 모진 시련의 어려움을 무엇보다 버티게 한 것은 가족이 있기에 가능하였으리라.      


 중학교 시절 갑자기 비가 내리던 어느 여름날 우산이 없어 당황한 사이 아빠 모습이 보였다. 차가 없던 우리 집의 교통수단은 두 발 달린 오토바이였고 아빠는 그것을 꽤 자랑스러워하셨다. 어디든 이동하기에 손색이 없던 우리 집이 보물이었지만 비를 뚫고 오신 오토바이를 탄 아빠의 모습을 나는 오히려 창피해했다. 아빠가 내민 잠바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후 뒤에 탄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웃었고 그게 몹시도 싫었다. 차라리 비를 맞고 가는 게 나았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그런 마음을 가진 내가 밉기도 했다. 웃은 친구에게 서운한 마음도 들어 어린 마음에 나름의 상처가 되었나 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 품은 창피하고 우스운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고 당당한 것이다. 비가 올 때의 오토바이 풍경은 이제는 나는 볼 수 없다. 아빠가 말하지 않아도 묵묵히 이어 온 시절의 기억은 우리를 위해 매일 마음을 쓸어내리며 정성을 다해 꽃 피운 다정함이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가정이지만 온기가 있었고 소소함에 깃든 행복을 가득 받았고 작은 일에도 감사함을 알게 아빠의 품성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에 내가 받은 만큼 내리사랑으로 이어져 간다. 아빠처럼 가득한 사랑은 나에게로 통하여 다시 아이에게로 이어져 간다. 아빠가 주신 만큼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전해져 간다. 누군가와의 비교가 아닌 자신의 사랑은 자연스러울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크기와 상황이 어떻든 마음이 다해져 간다. 아빠의 사랑만큼(아직 다 알지 못하겠지만) 가져갈 기억은 내 마음 안에 있는 어린 나로부터 지금의 나와 내일의 나에게 여전히 머물러 있다. 그러기에 사진첩에 든 사진처럼 보고 싶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옛날 물건을 보고 갑자기 생각나는 어느 순간에도 언제든 그 사랑을 꺼내 볼 수 있다.


아빠는 어쩌면
훌훌 멀리 떠나버린 것이 아니라
나의 기억 안에 그대로 살아 숨 쉬고 호흡하며 이내 씨앗처럼 내리사랑을
              퍼트리고 있나 보다.                



지금은 기억 속에만 남은

              


#아빠 생각 #서툰 그림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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