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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아 Aug 01. 2024

라면 한 그릇

가장 뜨거운 날의 마음


삶은 어쩌면 가장 가까운 것들을 보듬고 아끼어 가는 일인 것만 같다. 누구에게나 있을 가장 가까이의 다양하고 소소한 일들 안에는 분명 내가 아껴주고 사랑한 것보다 더한 감동과 기쁨이 사랑의 빛깔로 서서히 번지어 되돌아오기도 한다.


자취하는 대학 3학년 큰딸이 종강하여 집으로 온 날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던 고 2 둘째 딸이 방학하여 집으로 오기까지 꽤 조용했던 집은 이내 왁자지껄 소음이 시작된다. 여름의 계절에 걸맞은 청춘들이 집으로 돌아오니 그만한 활기가 선명해진 시간 사이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막내와 남편, 나 셋이서만 콩닥거리다 다 큰 아이들이 집에 오니 어느새 콩닥거림은 시끌벅적 통통 튀는 공의 탄력만큼이나 집 안 가득 채워진다.      


집으로 이동한 아이들 짐 하나하나 세탁하 정리할 일투성이지만 막내 은솔이가 학교 돌봄 교실 가는 일부터 집안 정리, 저녁 밥상 차리기 등을 함께 돕는 아이들이 있어 내 손이 하던 일들은 이미 반이나 줄었다. 아니 그 이상 줄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나름 바둥거렸던 일들을 여럿이 함께하니 시간도 절약되고 에너지 소모도 덜 된다. 더욱이 요새 의료기관 인증 준비로 바쁜 나날이기에 이렇게 함께 서로 지켜내는 마음들이 있어 더 큰 힘으로 보태어진다.


며칠 전 인증 평가 업무에 따른 막바지 준비로 퇴근이 늦어져 가족들 먼저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큰딸 지운이가 전화를 해 얼마나 늦는지 묻는다. 밥도 못 먹고 늦게 오는 엄마가 걱정인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까지 끝냈다는 딸아이 말에 한시름 마음을 놓았다. 내가 못 먹더라도 나머지 식구들이 챙겨 먹었다는 자체로도 고마웠다.      


운전하는 퇴근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전화기 너머 ‘꼬르륵’ 허기진 배가 요동을 친다. 불현듯 라면을 꼬들꼬들 매콤하게 끓여내 김치 한 점 올려 뜨끈하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 안 가득 풍부하게 퍼지는 라면은 향마저 일품이다. 라면 국물에 밥까지 훌훌 말아먹으면 훨씬 맛있다. 워낙에 라면을 좋아하기도 하여 매번 먹을수록 때마다 누가 개발한 음식인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지운아, 엄마 라면 먹고 싶어. 집에 가서 라면이나 간단하게 끓여 먹어야겠어.”


“그래요? 어디쯤이에요? 제가 끓여 놓을게요.”


“괜찮아. 동생도 보면서 밥 챙겨 먹고 치우기까지 힘들었을 텐데 엄마가 가서 챙겨 먹을게.”


“에이. 엄마, 아니에요. 제가 맛있게 끓여 놓을게요.”     


성화에 못 이겨 결국 그러라 했다. 엄마 먹으라고 챙기는 마음이 이뻐서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말 안에 미안함이 묻어난다. 늦은 업무로 힘들었을 엄마를 위한 마음이 크게 다가오면서도 괜히 딸아이에게 집안일로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안쓰러운 맘이 생긴다.     


도착 후 식탁 위에 놓인 라면은 이미 나를 홀린다. 배고픈 중년의 여성이 앉은 식탁은 꼬들꼬들한 면과 국물까지 사랑 이야기로 가득 풀어져 있다. 매콤한 라면 향이 코로 들어와 입맛을 돋우고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에 누적된 피로가 금세 풀린다. 세상 어떤 음식보다 가장 맛있고 귀한 음식을 마주한 나이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정성 어린 음식을 이리도 멋지게 만들어 주다니 ‘후후’ 웃음기가 가득한 감동이 보글대는 파도의 거품만큼 깊게 밀려 들어온다. 비록 사소한 라면 하나에 지날지 몰라도 내게는 그 어떤 음식보다 가장 소중하기만 하다.


딸이 엄마를 위해 좋은 마음으로 ‘폴폴’ 끓여낸 정성이 오롯이 그릇 안에 들어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중요치 않다. 김치 한 접시 덜어 식탁 위에 두고 한 입 ‘앙’ 넣어 먹으니 그 안에 서린 어린 시절의 지운이의 모습이 보인다. 귀여운 외모에 별다른 투정 없이 어린 시절을 나고, 나름 사춘기는 겪었겠지만, 일반적인 사춘기 시절의 까탈스러움과 예민함은 잘 보이지 않았다. 참아낸 일들이 많은 건지 아니면 겪어가며 자신의 마음을 다잡은 과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필시 속이 깊은 아이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소망하던 꿈을 이루기 위해 무던히도 달려 애쓴 것들로 가득하다. 쌓인 시간만큼 이룬 모든 일은 사소한 것도 절대 헛되지 않다. 그저 부모이기에 바라본 일들 안에 느꼈을 조바심과 안쓰러움과 지지와 인내, 그리고 사랑의 마음이 뒤엉켜 그렇게 한 사람을 보살펴간다.      


큰딸은 집에 오자마자 막냇동생 차지가 되었다. 제일 좋아하는 언니가 집에 오니 온 세상을 얻었다. 투정을 부려도 이쁘다 해주고 엉덩이 톡톡 두드리며 따뜻하게 말해준다. 은솔이가 하는 말에 다정하게 이야기도 잘 들어주니 편하고 좋은 존재일 것이다. 누구보다 내 편인 언니이다. 이런 막내 육아 덕분(?)으로 현재 유아교육학과를 전공하고 있으니 아이 다루는 것쯤은 웬만한 성인보다 낫다.     

 

라면 하나로 느끼어가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자연스럽게 지켜준 마음들이다. 강요와 핍박이 아닌 지지와 응원이 서로에겐 삶을 나아가게 할 버팀이 된다. 그것은 부모이기에 내어줄 역할이다. 마음으로 해주고 싶은, 챙기고픈 어여쁜 생각들이 이어져 내어 준 사랑만큼 길게 물들어간다. 그것을 어느 날 하나씩 더 크게 돌려받을 때가 있다. 오늘의 라면 한 그릇처럼 말이다. 가족은 있는 그대로를 믿어 보아 주고 아껴주고 지켜주는 존재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더 큰 사랑으로 주거니 받거니 라면 면발처럼 하염없이 흔들릴 뿐이다.


참으로 맛있게 잘 먹었다. 고마워. 내 새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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