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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아 Jul 24. 2024

봉숭아의 꽃말은

엄마의 사랑이 듬뿍 담긴 그리움

“와! 잠깐만! 너무 오랜만이다. 이 꽃을 본 지도.”


비가 하염없이 내리다 모처럼 날이 맑아 동네 어귀를 아이와 함께 걸었다. 지나는 길에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꽃송이들에 발길을 뚝 멈추고 한참을 앉아 이리저리 살폈다. 초록 잎사귀 사이에 주황, 빨강, 분홍, 하양 갖가지 빛깔들이 수줍은 미소로 송알송알 영글어 맺힌 꽃잎들이다. 요새 통 볼 수 없던 꽃이라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예전에 여름이 오면 어김없이 길가며 마당에 어디서든 즐비하게 피어 있던 꽃이라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빛깔은 그때의 마음을 담아 여전히 이 여름을 비춘다. 흔하디 흔했던 봉숭아 꽃잎들은 여름의 비를 듬뿍 머금어 탐스러웠고 햇볕의 따스함 안에 슬며시 바람을 지키며 토양의 양분을 품어 유유한 꽃잎 자태를 뿜어냈다. 너무나 흔했기에 당연함으로 지나치던 것들을 지금 마주하는 것이 이처럼 반가운 이유는 그리운 추억의 한 곳으로 나를 불러냈기 때문이리라.


엄마는 봉숭아가 한창인 여름날이면 백반을 사다 봉숭아 꽃잎의 빛깔을 따서 잎사귀에 함께 버무려 콩콩 찧는다. 한참을 두들긴 봉숭아 꽃잎 즙에선 초록의 진한 풀향기가 가득했다. 손에 묻는 줄도 모르고 나와 동생들 손톱 위에 하나씩 얹어 조심스럽게 모양을 만든다. 그 위를 비닐로 감싸 실로 묶으면 완성이다. 손을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좀 더 예뻐질 마음으로 설레었다. 그러다 얼마 못 가 궁금한 마음에 참지 못하고 엄마 몰래 비닐을 벗겨내면 채 물이 들지 않은 손톱이 아쉬워 울상을 한다. 엄마는 다시 비닐로 감싸 고정하며 내일이면 예쁜 손톱을 보게 될 거라고 만지지 말고 그대로 자라고 하신다. 


모기장 안에 옹기종기 모여 나란히 누운 우리는 긴긴밤 시끌벅적 난리 블루스다. 시끄럽게 재잘대던 우리 중 누가 먼저 잠드는지도 모르게 선풍기는 돌아가고 밤은 점점 깊어지고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밤을 타고 와서 유난히 비비적거린다. 

조용한 소음이 시작되던 어린 날 여름밤이 지나면 아침을 빼꼼 맞이한 새빨간 손톱은 이미 태양을 삼켰다. 손톱 주변으로도 붉게 물든 빛깔은 얼룩덜룩 야단이지만 며칠이 지나면 투명한 손톱 위에만 붉은빛 흔적만 남아 눈에 아른아른할 만큼 예쁘다. 그렇게 열 손가락 가득 엄마 손길은 여름 내내 걸려 있었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이 빛깔을 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지금은 믿지 않을)을 가장 가까운 진실로 믿어간 시절의 순수한 기억이 봉숭아 꽃물 사이에 걸려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순수함이 너무 예뻐 배시시 웃음이 난다. 


마주해 앉아 있는 봉숭아 꽃자리는 오랜만에 스멀스멀 올라와 가장 찬란했던 여름의 그리움을 낳는다. 해마다 여름이 엄마와 나를 이어준 손톱 사이로 물들어간다. 요새는 봉숭아꽃 무리를 예전처럼 잘 보지 못한다. 시대가 바뀌니 한때의 추억을 이고 갈 방법마저 달라진다. 다이소나 문구점에 가면 봉숭아 물들이기 세트가 제품으로 나와 있어 손쉽게 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이것을 발견했을 때 빠르게 효과를 볼 수 있겠다는 장점과 함께 긴 시간 봉숭아 물들이며 부대끼던 경험을 아예 할 수 없겠다는 아쉬운 마음이 교차했었다. 분명 이것은 이전에 했던 것만큼 거추장스럽지도, 오래 걸리지도 않는 간편함이다. 그러나 어떤 간편함은 간혹 사람 사이에서만 나눌 수 있는 따스함을 잃어버린다. 빠르게 흐르기만 하면 불편이 주던 시간의 아날로그적 감성 안에 멈추어 몸과 마음을 통해 이어진 오감을 느끼기가 참으로 어렵다. 


엄마는 오랜 시간 꽁꽁 처맨 비닐 안의 손톱 빛깔이 진하게 내려앉도록 꽃잎을 한 아름 빻아서 한 올 한 올 기억을 소복하게 담아주셨나 보다. 못내 그리운 어린 시절의 모기장 안, 서로 부대끼며 나란히 누워 ET 같은 손톱 모양 환하게 들어 대며 한바탕 웃음 웃던 그 시절 이야기로 물들어간다. 톡 터지던 봉숭아꽃말은 여리지만 간결함으로 엄마의 사랑을 그대로를 믿어간 어린 날의 그리움이 아닐까? 느림의 미학이 주던 시간의 크기만큼 더운 여름날이 촉촉해지도록 봉숭아의 꽃물만큼 물들어간 어린 날의 추억을 꺼내어 보아 간 오늘의 일상이다. 



너무나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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