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주고받기에 서로 배워가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자체로 아이는 마음을 드러낸다. 가장 편안하고 친숙한 얼굴로 언니를 본다. 가끔 부리는 투정과 미운 짓도 언니 앞에서는 어리광이 된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만 나면 쪼르르 달려 나간다. 오매불망 문 열리기 기다리는 은솔이는 우리 가족 중에서 큰언니를 제일 좋아한다. 학교 수업 중에 있었던 편지 쓰기도 언니에게, 제일 좋아하는 사람 이름 적어내기도 일 순위는 언니이다. 방학이 되어(대학교 수업 종강 후) 언니가 집에 오니 마치 이산가족 상봉이나 한 듯 꼭 붙어 지내는 요즘이다.
큰아이는 힘들 법도 한데 집안일도 챙기고 동생까지 돌보고 있으니 퇴근 후 집에 오면 내가 할 일들이 아주 수월해졌다. 병원 업무가 바빠 늦게 퇴근하여도 큰딸이 있으니 걱정이 없다. 전생에 내가 무슨 복을 받았는지 아이에게 고맙고 미안할 정도로 엄마 옆을 잘 보아가며 스스럼없이 도와주고 있어 나에게도 여름방학이 제대로 찾아왔다. 하나보다 둘이, 둘보다 셋이 낫다. 요새 가장 편해진 것은 동생 아침밥 챙겨 먹이고 학교 보내는 일(가끔은 언니와 집에 있기도 하고)과 돌봄 교실에서 점심때 먹을 도시락을 싸는 일이다. 엄마가 바쁘니 이것을 딸이 대신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은솔이는 언니의 계란말이를 제일 좋아한다.
“엄마, 엄마 출근하시면 도시락은 제가 싸서 보낼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출근하세요.”
등 떠밀다시피 딸은 나를 보낸다. 방학이 되면 엄마가 바뀐다. 딸아이 배웅을 받고 잘 다녀오라는 가득한 응원에 힘입어 밖을 나선다. 마음으로 안도하고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저벅저벅 소리를 낸다. 아이들 덕분으로 엄마인 나는 다시 엄마로 성장한다. 내가 내어준 사랑은 같을지라도 시간에 따라 여며지는 크기는 다르다. 탄생의 순간부터 자라기까지 돌봐 온몸과 마음은 때론 서툴러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 안에 사랑과 기쁨이 늘 존재하기에 아이들한테서 배워가는 것이 분명 있다. 사랑의 크기는 같다고 하지만 두고두고 나누어야 하는 일이기에 각자 받는 양의 차이는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내어 준 사랑의 크기와 상관없이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주고 따라주는 아이들이 있어 대견하다.
엄마는 출근하였지만 가장 든든한 언니가 있어 은솔이의 학교 가는 길은 무섭지 않다. 혼자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누군가 옆에서 지키는 마음이 있다는 것. 은솔이는 그게 가장 좋은가 보다. 현관을 나서기 전 빼꼼 도시락 뚜껑을 연다. 언니가 무얼 쌌는지 궁금하여 살며시 고개를 숙여 눈망울은 반짝 기대에 차 있는 모습이 출근한 엄마 눈에 아른거린다.
“언니, 오늘 도시락 반찬 뭐야?”
“응, 은솔이가 좋아하는 계란말이지.”
“앗싸! 역시 언니는 내 맘을 너무 잘 안다니까~”
신이 나서 도시락 가방을 들고 나서는 아이의 뒷모습이 실룩댄다. 엉덩이가 들썩이며 폴짝폴짝 잘도 달려 나간다. 여름인지라 길게 드리운 하늘은 이미 푸르게 밝아져 있다. 말갛게 푸르러진 하늘을 타고 하얀 구름은 햇빛의 열기를 가득 품어낸다. 구름을 타고 온 한여름의 온기는 땅으로 이어져 나무와 하늘 끝까지 매미 울음소리로 청량하게 뿜어지며 온통 시끌시끌해진다. 햇빛의 소음은 여름의 땀방울을 내어주고 언니와 손잡은 학교 가는 길은 흐르는 땀방울만큼이나 활발해진다. 눈에 익은 가장 긴 여름 안에 9살 인생에서의 추억을 길마다 성큼성큼 잘도 놓아간다.
도시락 하나에 온 사랑이 다 들어 있다. 엄마의 마음과 언니들의 사랑과 아빠의 수고, 자연이 이루어준 모든 것이 가득 들어 있다. 이렇게 묻어갈 것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드리워질 지켜줌이다. 서로가 있어 든든해질 사랑은 손에서 손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 아이의 웃음이 어째 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도시락 하나로 매일 나는 고마움을 공짜로 가져간다. 어쩌면 나는 아이들로 인해 날마다 사랑을 다시 만들어 내고 싹을 틔워 영그는 꽃을 피우기까지 단단해질 양분을 무수히 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좋아한다는 것은 기준이 없다. 그저 좋은 것은 이유 없이 가슴에서 우러난다. 가끔의 서툼과 가끔의 실랑이와 가끔의 서운함마저 사랑이 있기에 언제든지 자연스럽게 서로 이어질 소중함을 만들어낸다. 은솔이가 제일 좋아하는 큰언니와의 여름방학이 시간이 멀리 흐르더라도 두고두고 오래 기억될 그 자리였으면 참으로 좋겠다.
여름방학의 추억은 함께 하는 것으로 서서히 이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