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안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지도 목적으로 출력한 평가표와 지침 교육 자료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한다. 부수적으로 사용할 교재들과 논문 자료를 잔뜩 넣으니 무거워진 가방은 ‘이제는 나 들어갈 데가 없소’ 하며 빵빵하게 부풀린 배를 내어 보인다. ‘이제 됐다.’ 가방을 닫고 거실 한쪽에 잘 놓아둔다. 내일은 너와 내가 한 몸이 되어야 하기에 온통 신경이 쓰인다. 임상 실습을 나간 4학년 간호대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건국대학교 근처 스터디 모임 장소로 찾아가야 한다. 그전에 지하철은 몇 번 타 보았지만 익숙지 않은 장소로 찾아가는 여정은 여전히 설렘 반 긴장 반의 감정을 가지게 한다. 더욱이 해당 장소로 찾아가기까지 잘못된 길을 들어선 순간 회복하기까지의 아찔함이 있기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을 어릴 때 많이 들었던 서울이니만큼 아직 마음 한쪽에는 조심스러움이 남아 있으니 고도의 집중을 요구할 것이다.
오송역에서 KTX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보게 된다. 여기저기 다른 일로 모인 분주함은 각자가 가진 하루의 소중함이기에 잘 치러진 시간의 톱니바퀴처럼 연결되어 돌아간다. 흐르는 시간만큼 가고 있는 각자의 이유와 시선이 참으로 궁금해진다. 이윽고 열차는 도착하고 나는 비로소 무거워진 가방을 손에서 놓아 자리에 앉는다. 검은색 빵빵한 가방을 바닥 한쪽에 두고 또 다른 가방(지갑, 책, 핸드폰, 그 외 소지품이 들어 있는)에서 책을 꺼내어 펼친다. 혼자 이동하는 열차의 묘미는 한 권의 책에 있다. 새로운 장소에서 흐르는 시간만큼 문장을 더하는 기쁨은 더없이 즐거운 일이다. 무거운 가방은 발아래 놓여 있고 들고 온 긴장감을 한 단계 멈추어서 한 모금 커피와 함께 덜어내는 글귀의 조합은 어딘가로 시끌벅적 마주할 여행으로 떠나는 초입에서의 안도감을 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50분의 시간에 나름의 묘미가 일상을 사로잡는다.
어느새 다다른 서울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세상이다. 어디서 왔을지 모를 사람들의 얼굴은 서로 모르기에 더더욱 복잡 미묘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표정 없이 걷는 듯하지만 펼쳐진 도시를 꽉 부여잡은 청춘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묻어 있다. 이리저리 복잡하고도 어지럽게 도는 느낌이지만 나름의 규칙이 존재하니 어느 시간이 소중하지 않을쏘냐. 평소 익숙한 곳에서의 시간은 때론 더디게 흐르나 도착한 서울의 풍경은 순식간에 흐르니 시간마저도 눈 뜨고 코 베이는 게 틀림없다. 역에서 우선 이른 점심을 하고 4호선 플랫폼으로 이동한다. 무거운 가방을 더한 왼쪽 어깨를 지탱하려 다른 쪽 가방의 어깨 기울기는 바빠지고 있고 길을 제대로 찾아가야 하기에 손에 든 휴대폰마저 놓을 수 없어 번거롭기만 하다. 그러나 나의 길잡이가 되어줄 길 찾기 앱을 절대 놓을 수 없기에 지금은 한 몸이 될 수밖에 없다.
찾아갈 곳은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장소지만 2번을 갈아타서 이동해야 하기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반대로 타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여야 하기에 주시하고 있는 눈은 이미 벌게지고 호흡마저 가쁘게 돌아다닌다. 혼자이지만 절대 혼자인 척하지 않을 서울행, 더욱이 초보 티가 나지 않도록 시선을 의식하는 모양새도 참 우습다. 가방을 낑낑대며 가는 것도 벅찬 데 여기에 원피스에 구두라니 후회가 밀려온다. 벌써 땀이 흐르고 있는 나의 상태로는 우아함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불편함을 주고 있으니 다음 주는 편한 신발로 신고 와야겠다.
낮이라 그런지 덜 혼잡한 지하철이라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출입구 가까이 한쪽 벽에 기대어 온몸에 힘을 준다. 출발하거나 멈출 때 자칫 쓰러지지 않으려 무게 중심을 잡고 이번 역이 어디인지 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눈은 매번 멈추는 역에 있으니 이보다 바쁠쏘냐. 내가 가야 할 곳이 점점 다가온다. 이번에는 2호선만 통과하면 된다. 야호! 1차 성공이다.
2호선까지 성공하여 뿌듯한 마음으로 건대입구역을 나온다. 여기서 나는 스터디 장소로 찾아가야 하는데 동서남북이 어딘지 혼란스러워 그곳에 서서 한참 앱을 쳐다본다. 실시간 이동을 켜면 좋았겠지만 4분 거리면 도착하니 일단 지도를 참조로 이동한다. 가다 보니 4분이 훌쩍 지나고 아무래도 이상하다. 지도에 나와 있는 주변 상가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건널목에 멈춰 옆에 있는 젊은이에 묻는다. 그도 여기를 전혀 모르겠단다. 이어폰을 끼고 황급히 이동하는 또 다른 젊은이를 불러 세운다.
“Excuse me, 모어스터디로 가야 하는데 이곳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아, 이곳은 반대로 가야 해요. 계속 직진해서 이 상가 끼고돌면 되어요.”
“아! 감사합니다.”
역시 세상은 연결되어 있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고 있다.
그나저나 시간은 다 되고 있고 땀이 불끈 솟아난다. 아직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서울이지만 서울을 구경할 틈이 없다. 나의 임무는 오로지 그곳이니만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보자.
파리바게뜨가 보인다. 무척이나 반가운 빵집이다. 이곳을 돌아 좌회전하면 도착하니 마감 임박 다 팔린 매대의 제품만큼 홀가분해진다. 와! 성공이다. 도착 후 배정된 스터디룸으로 이동하니 긴장이 드디어 풀린다. 시골 아줌마의 서울행은 일단락 마무리! 아! 그런데 여기서 진이 다 빠졌다. 장장 5시간 동안 학생들과 conference를 진행하며 평가하고 토론할 시간이 남아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