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은 서로 이어져
마무리는 또 다른 시작이다. 6월의 끝은 다시 올 7월이라는 새로운 날들이 펼쳐지는 달이다. 단 하루 차이로 마무리와 시작이 이어진다. 7월이 오면 나는 지금의 공간을 떠나 다른 공간으로 건너간다. 오십을 바라봄에도 지금 내 나이와 협상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아직도 임상에서의 일들이, 환자를 바라보는 일들이 좋기 때문이다. 필요한 곳에 내 손길을 더할 수 있는 시간의 기록은 그날의 내가 된다. 지금껏 해 온 간호가 부끄럽지 않으려 스스로 먼저 당당해질 일들을 만들어야 한다. 침을 ‘꼴깍’ 삼키듯 두려움을 먹어 없애고 해내는 일들은 더디겠지만 기어코 나의 역량을 만들어 간다.
아주 작은 것, 보이지 않는 일조차 내가 먼저 보아 가는 일이기에 결코 하찮게 대할 수 없다. 마음이 그렇다.
아픈 이들을 보아갈 때, 생명을 마주할 때마다 작은 일들은 큰일이 된다. 작은 손길 하나에 올바른 간호를 넣어야 하기에. 바늘 하나를 통해 주사 투약을 할 때에도 환자의 마음을 만지는 일들이기에 그것은 손으로 다시 피어난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는 사이의 기운은 오히려 나를 뿌듯하게 세운다. 겪어가는 무수한 말들 안에 사로잡혀 어수선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어떠한 긍정의 씨앗을 심어갈지 알아가는 순간이 재미있다.
내 가치를 이룰 일들은 경험을 통해 다시 생성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지금 나는 이곳을 떠나 새롭게 이룰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곳이 어떨지 아직은 모르지만,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나온 연륜의 힘이랄까? 그 또한 연륜, 그 안에서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며. 나만 정답이라는, 내가 해왔던 방식이 ‘옳다’라고만 여기는 벽 세우기 말이다.
새로움은 고통을 수반한다. 적응하기까지 견디는 시간 안에 환자와 나, 동료 직원들과 나, 다른 부서 사람들과 나 사이의 경계를 잘 만들어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바탕이 되어 나 혼자만의 고집과 아집이 아닌 허물을 보듬고 이어나가도록 구슬을 한 땀 한 땀 잘 꿰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어찌 보면 가장 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내 생각에 따라, 나의 행동에 따라.
오후에 중증 화상 환자를 만났다. 오늘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근무니 여기서는 나의 마지막 환자인 셈이다. 작업 중 유해 물질이 폭발하여 얼굴과 상반신 전체가 화상이다. 얼굴은 이미 부종이 진행되었고 타면서 생긴 그을음이 콧속, 잇속을 장악했다. 묻어나는 그을음을 연신 닦으면서 기도 부종 여부를 면밀히 관찰한다. 호흡에 지장이 없고 산소포화도며 혈액 검사 수치가 좋아 우선 주기적으로 모니터링을 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기관 내 삽관 장치와 인공호흡기는 가까이 준비해 둔다.
통증을 경감시키고 감염 관리 및 상처 회복을 위해 상처를 산소와 만나지 않게 습윤 드레싱을 한다. 항생 연고를 도포하고, 삼출물을 흡수할 수 있는 폼 제제를 덮어 탄력 붕대로 감싼다. 이렇게 되면 어느 정도 화끈거리는 증상을 감소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필요한 검사를 추가로 진행하고 파크랜드 법칙에 따라 수액 소생술을 진행한다. 환자의 체액과 가장 비슷한 성분의 수액을 준비하되 화상 범위와 환자 몸무게에 따라 시간당 수액의 양이 결정된다. 전신 화상의 경우 체액 불균형과 장기 부전 상태에 이르기까지 합병증이 많으므로 적절한 수액 관리와 소변량 체크, 그 외 감시요법은 필수다.
수액이 흐르고 진통제가 추가된다. 드레싱만으로는 감당되지 않을 통증을 완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된다. 실제 진통제를 써도 웬만해서는 잘 듣지 않게 된다. 그만큼 통증은 상상 이상이다.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화상 치료를 몇 개월간 이어나가야 하니 하루하루가 고통 속에 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불편한 날들이 연속해서 나타나지만, 익숙지 않은 고통은 날마다 반복되지만 조금씩 치유되고 걷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로도 감사한 일이다.
다시 살아간다는 것. 마지막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있기에 날마다는 결국 새로울 수밖에 없다. 새로움은 끝이 아닌 생을 이어가는 것이다. 생이 있기에 시작과 마무리가 있으며 그것이 반복되는 것은 지겨움이 아닌 성장의 발판을 이루는 것이다.
붕대로 잔뜩 감긴 얼굴, 부종으로 인해 눈조차 뜨기 어렵지만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의 말들은 오히려 더 잘 전달된다. 귀로 듣고 말로 나타내는 것이 누군가에게 회복이 되는 말이라면, 격려의 말이라면, 보듬는 말이라면 환자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내 생각으로만 일괄되지 않게 어루만지는 간호의 손길에 마음을 조금씩 보탠다. 그의 힘겨움 안에 녹아든 간호가 보람찬 이유는 그의 힘겨움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함께 아파하는 이야기 안에서는 고통도 줄어드는 것처럼, 말 한마디의 힘은 실로 크다.
말초혈관을 통해 중심정맥관 삽입을 시도한다.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말초 삽입형 중심정맥관을 통해 수액이 들어가고 채혈하고 필요한 경우 수혈도 할 수 있다. 적절한 간호 처치는 때마다 이루는 일들에서의 고통 속에 함께 피어난다. 조심스럽게 이어진 관을 통해 카테터가 들어가고 적절한 위치에 고정한다. 새로운 일들은 낯선 것으로부터 익숙함을 빼앗아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기도 한다. 결국 버텨낸 일들은 익숙함을 이루게 되고 힘든 과정 안에서도 좋은 것들을 심어가게 된다. 이 시술 또한 환자에게 처음이지만 믿고 따라주는 시간만큼 보답이 된다.
성장이라는 밑거름. 그것이 새로움을 대하는 자세다. 배움에 나이가 무엇이 중요하며 직책이나 경력은 또 왜 필요한가! 가장 훌륭한 가치는 새로움을 대할 때의 태도다. 어린 사람한테도 배울 수 있는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임이 필요하다. 나만 생각하면 새로움은 나의 것이 아니다. 화상을 입은 그의 앞날도 불편하고 어려운 일 투성이겠지만 그 또한 앞으로의 새로움이기에 과정마다의 경험을 잘 맞이할 수 있기를 빈다. 다시 살아갈 힘을 새로 얻는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6월의 달은 기울고 있지만 다시 시작될 7월의 일들이 기대된다. 6월을 잘 살아낸 만큼 7월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 또 다른 경험 안에 배워갈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여전히 나는 환자를 위해 날마다 작은 정성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라 여기며 간호로 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