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6
수박이 열렸다. 어디서 씨가 날아와서 크게 되었는지 모른다. 아니 우리가 먹다 버린 수박씨 때문인지 모른다. 하여튼 어느 날 수도 계량기 옆, 수북하게 잡초가 우거진 틈으로 수박이 보이는 거였다. 어? 이거 뭐지? 수박은 주먹만 하게 시작하더니 어느덧 어린아이 머리통만 해졌다. 수박은 줄기를 납작하게 땅에 깔고 머리 무겁게 크고 있었다. 행여 짐승이라도 쳐들어올까 봐 살뜰히 봐오던 것을 한 여름에 수확했다. 딱 하나. 맛은 심심했지만 살짝 단맛도 감돌았다. 수박을 우리 집에서 수확했다는 감개무량함이 그 단맛이었는지 모른다.
공짜로 수확한 수박
우리는 공짜 같지만, 수박은 풀들 틈에서 얼마나 애를 썼을까. 마당에 덩그러니 심어놓은 매화도 꽃이 지면 꽤 많은 열매를 맺었다. 유리병으로 한 병 정도 나오는 매실로 남편은 담금주를 붓고 매실주를 만들어 놓는다. 한 1년 정도 지나면 매실향이 살짝 올라오는 독한 술이 되어있다.
올해도 작년에 담가놓은 매실주를 홀짝홀짝 다 먹어버렸다. 향을 다 내놓은 매실을 아직 버리기 아까워서 유리병에 담아놓았다. 몇 개 안되지만, 몇 개 안되니까 귀한 것들이다. 사과나무도 흰 꽃을 피우고 나면 열매가 꽤 생긴다. 가을이면 주먹만 한 사과가 대여섯 개 열린다. 농장 하는 사람이나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들으면 웃고 말겠지만, 우리는 그 몇 개 안 되는 열매를 날마다 애지중지 들여다본다. 거름도 안 주고 농약도 안치니, 사과는 검버섯 올라오는 할머니의 얼굴처럼 검은 반점이 많이 있는 채로 자란다. 서리가 내리고 더 이상 크지 못할 거라 여길 때 사과를 하나씩 따먹는다. 아주 단단하고 새큼한 맛. 사서 먹는 사과가 갖지 못하는 맛이다.
원래 집터에 있던 단감나무 하나, 땡감 나무 하나도 가을이 되면 수확물을 준다. 단감은 몇 개 안 열린 것 같아도 따놓으면 꽤 많고 맛도 괜찮다. 뒷터에 심어놓은 살구나무는 살구가 익기 전에 떨어뜨려 버린다. 대신 무화과나무는 달콤한 열매를 꽤 내주곤 했는데, 절반은 새가 와서 쪼아 먹어 버려서 새들이 먹고 남겨주는 것을 먹을 수밖에 없다. 집 앞에 있으면 복이 들어온다고 해서 심어놓은 대추나무는 가장 많은 열매를 주었다. 수많은 열매가 맺히고 꽤 잘 여문다. 나무를 흔들거나 늘어진 가지를 잡아채서 하나씩 따먹으면 달콤한 맛이 들어온다. 블루베리 대신에 심은 아로니아는 열매가 딱딱해서 새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데, 우리 또한 맛이 너무 시고 떫어서 많이 먹기는 힘들다.
그러고 보니 참 많다. 감, 아로니아, 대추, 사과, 무화과, 어쩌다 공짜로 얻게 되는 수박까지.
한 평도 안 되는 텃밭에는 상추, 가지, 오이, 고추 등을 심는다. 고추는 심을 때마다 벌레가 어찌 그렇게 많이 생기든지, 다음엔 안 심어야지 하면서도 또 봄이 오면 욕심이 생겨서 심곤 한다. 방울토마토를 한 번 심어보았다가 혼이 났다. 그것이 줄기를 넓게 넓게, 그렇게 퍼져나가서는 다른 것들도 다 잡아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지는 나무처럼 잘 커서 여름 내내 따먹을 수 있다. 반찬 없을 때 두 개정도 따서 무쳐 먹으면, 자급자족하는 농민이 되는 것처럼 마음이 뿌듯해져 오기도 한다. 상추는 장마가 오기 전까지다. 장마가 시작되면 상추는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잎이 사그라지고 만다. 그전까지 부지런히 뜯어다가 상추쌈도 겉절이도 해 먹는다. 두 사람이 먹을 정도의 상추는 두세 포기면 충분하다. 처음에는 그것도 모르고 많이 사다가 빽빽하게 심었더니, 잘 크지도 못하고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텃밭은 먹기 위해서도 있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뷰도 상당하다. 작은 텃밭에 옹기종기 커가는 푸른 잎들을 보고 있는 즐거움이 꽤 크다는 거다. 그것들이 햇빛 좋은 날, 앞 뒤로 줄 맞춰서 투명하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한없이 평화롭고 조용해진다.
연함과 푸름과 맑음과 잔잔한 그늘과 흔들림이 거기에 있다. 간혹 텃밭에 들어가서 풀을 뽑아주어야 하는 수고도 해주어야 하지만.
남편은 내가 텃밭에 들어가서 풀을 뽑고 있으면 꼭 뭐라고 한다. 지들끼리 크게 냅두라고. 지들끼리 경쟁하면서 크는 거라고. 그래야 맛도 더 좋은 거라고. 그렇지만 나는 여린 것들이 시달리는 것 같아서, 풀이 우거져 있으면 마음이 불편했다. 자주 뽑아주어도 여름철만 되면 풀은 어찌 그리 빨리 커버리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풀이 또 올라와 있곤 한다. 장마철에는 풀과 상추나 머 그런 것이 서로 엉크러 져서 뭐가 상추인지 가지인지 모를 정도가 되고 만다. 나는 남편에게 당신이 게을러서 풀을 안 뽑는 거라고 타박하고, 남편은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나를 구박한다.
텃밭 하나를 두고도 우리는 이념(?)과 습관이 참 많이 달랐다. 깔끔하고 보기 좋아야 하는 나에 비해, 남편은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게 좋다고 여긴다. 풀 뽑는 수고로움에 지쳐서 그 자연스러움에 저절로 항복할 때가 많지만, 텃밭이나 잔디밭이나 우선 보기에 좋아야 한다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소신(?)이다.
바람 불지 않은 따뜻한 휴일이면 어김없이 챙 넓은 모자를 챙겨 쓰고, 엉덩이 방석을 차고 호미와 대야(뽑은 풀을 담기 위한 것)를 들고 마당으로 출동한다. 여기도 풀, 저기도 풀... 풀들을 쫓아다니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지나버린다. 한 시간이 지나도 남편은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대신 거실에서는 한가한 음악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올 뿐... 남편은 책에다 코를 박고 있다가 마당을 내다보며 안경 너머로 한 마디씩 던진다.
엔간히 해, 그만하고 들어와, 뭐하러 뽑아...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