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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Jan 09. 2022

이해와 받아들임



   이해


이해한다는 것은 내 몸이 그것에 가 닿아

거친 마음 문대다가 가까이 귀 기울이다가

잠깐 깊은 숨도 쉬었다가 가슴 치며 멈추기를

몇십 번

또 몇십 번

그렇게 오랫동안 닳아지고 나서야

무릎에 들어오는 통풍痛風 같은 것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학교에 다니고 직장에 다니고, 그러면서 수없이 만난 사람들. 그렇다. 수없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들을 모두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해하기 앞서서 그냥 좋아져 버리는 사람들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었다. 내가 이해해야 하는 사람들은 좋아지지 않는데 나와 계속 인연을 맺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이해한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은 분명 다른 말이다.  나와 잘 맞으면 좋아지는 것이고 나와 잘 맞지 않으면 이해해야 했다. 

 그중에 내가 몸부림쳐가며 이해하려고 애썼던 대상은 단연코 남편이었다. (왜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남편의 굴레에서 벗어나오지를 못하는가? 왜 나의 화제의 대부분은 또 남편인가? ) 사랑에 눈이 멀었을 때는 이해고 뭐고 없었다. 그런데 같이 살면서부터 끝없이 부딪쳤던 상황에서 나는 이해의 두레박으로 저 깊이 가라앉아 있는 '사랑'과 '신뢰'라는 것을 길어 올려야 했다. 몇십 번, 또 몇십 번. 이해하려는 몸부림이 가라앉았을 때 내 몸이 아프곤 했다. 


 그런데 이제 조금씩 알아간다. 내가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순전한 아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가 쳐 놓은 선에 남을 들여앉히는 일과 같다는 것을. 이해란 내 영역 안에 상자를 욱여넣듯이 타인을 자신의 구미에 맞게 들여앉히는 일이다. 그때 내가 쳐놓은 영역은 선하고 옳은 것이라는 의식이 내재해 있기 마련이다. 남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그렇게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내가 쳐놓은 선이 그만큼 비좁고 단단했기 때문이었다. ( 아이 키울 때는 잠 자기 전에 거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하루가 마무리되는 것 같았고 그래야먄 잠이 왔다, 그만큼 내가 쳐놓은 습관의 벽과 생각의 벽이 심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늘 자신의 잣대로 남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많이 아프고서야 알아간다. 상대방은 나의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의 잣대라는 것은 곧 나의 한계와 같은 말이라는 것.

  

남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었다. 남편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울고불고 해도 남편은 남편 그대로이다. 내가 애써서 이해했건 못했건 그것과 상관없이 남편은 그대로 남편일 뿐이다. 이해하고 안 하고는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였다.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나는 누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 가슴을 빠개서 누구를 들여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모두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한다. 모두 받아들이는 것, 모두 인정하는 것. 상대방의 모든 것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곧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과 같다.

 

 그런데 이런 마음,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을 둘러보면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막상 몇 명이 안 된다. 수없는 사람을 만나가며 살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손바닥에 올려놓은 모래알이 스르르 빠져나가듯이 내 손바닥 안에는 누가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빈 손바닥을 들고 남을 받아들인다고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는 몇 되는 사람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그들은 내가 건너야 할 강에서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이들이다. 배는 우리 모두의 무게를 싣고 간다. 우리는 그냥 함께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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